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현해당 이종헌 Oct 17. 2017

누가 천리마에게 소금 수레를 끌게 했던가?

현해당의 북한산 이야기 6. 이말산과 창랑 홍세태 

비봉 능선에서 바라본 이말산. 이말산에는 정조의 이복 동생, 은언군과  숙종~영조 연간의 위항시인 창랑 홍세태의 묘가 있었다.

서울 지하철 구파발역 2번 출구를 나와 은평 둘레길 제3코스 이말산 묘역 길로 향합니다. 구파발역을 출발해서 진관 근린공원과 하나고등학교를 거쳐 은평 한옥마을에 이르는 약 2.7㎞ 코스입니다. 동북 방향으로 우뚝우뚝 솟아있는 북한산의 화강암 연봉들이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남성미를 연상케 한다면 해발 132.7m의 야트막한 토산인 이말산(莉茉山)은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한 느낌을 줍니다. 기승을 부리던 꽃샘추위도 한풀 꺾인 3월의 어느 날, 스펀지처럼 부드러운 이말산 흙길을 따라가 봅니다.


이말산은 산에 말리화(茉莉花), 곧 재스민이 많아서 생긴 지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 같은 지명이 사용됐던 걸까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완산 이씨 묘역의 이세철 묘비와 조선 영조 연간에 정래교가 쓴 창랑 홍세태의 묘지명 등에 '이말산(莉茉山)'이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18세기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말산의 '이말(莉茉)'은 정말로 재스민을 뜻하는 말이었을까요? 한자로 이말(莉茉), 또는 말리(莉茉)가 둘 다 재스민을 뜻하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재스민이 외래종으로 조선시대 이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아니었음을 감안하면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더구나 최근, 조선 숙종 영조 연간에 활동했던 역관 이영수의 묘비에서 '이말산(李末山)'이라는 표기가 발견됨으로써 '이말'이 곧 재스민이라는 주장은 더욱 신뢰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말(莉茉)'은 어쩌면 본래 한자어가 아닌, 순우리말의 한자 표기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이말(李末)이라는 표기도 가능했던 것 같고요. 그렇다면 우리말 '이말'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 말이었을까요? 조선시대에는 성저십리라고 해서 도성으로부터 십리 이내에는 묘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이말산은 바로 성저십리의 경계 밖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도성 서쪽의 대표적인 매장지(埋葬地)로서 특히 내시, 궁녀, 역관, 의원 등 중인계층의 묘가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혹시 이 같은 특수한 환경이 이말산이라는 지명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말산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인석 I 봉분은 파헤쳐진 채 사라지고 문인석만 홀로 남았다.

영천이씨 묘역을 지나면서부터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석물들이 눈에 띕니다. 어차피 유한한 인생, 삶의 끝자락은 곧 죽음이라고 해도 여기저기 파헤쳐진 봉분들과 주인 없이 흩어져 있는 석물들을 대하노라니 왠지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살아서의 삶은 비록 고단하였을지라도 죽어서나마 편히 쉬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살아있는 자들의 한결같은 바람일진대 오늘의 이말산은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는 고혼들의 비명으로 가득합니다.


다시 발걸음을 은언군 이인의 묘터로 옮깁니다.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 서자로 태어난 은언군 이인(李䄄)은 조선 제22대 군왕 정조의 배다른 동생입니다. 1754년에 태어나 10세 때 은언군에 봉해졌으나 사도세자가 죽은 후 할아버지 영조의 미움을 사서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정조 10년인 1786년에는 장남 상계군의 역모죄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습니다. 


강화도에서의 유배생활 중에도 정순왕후 등 반대세력으로부터 역모의 근원으로 지목되어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정조의 비호로 그나마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조가 죽자 결국 1년도 안 돼 부인과 며느리가 주문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구실로 강화도 배소에서 사약을 받고 향년 48세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이 은언군의 묘가 양주군 신혈면 산 78-1번지 이말산 언덕에 있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의 손자가 조선 제 25대 왕 철종으로 등극하였기 때문에 왕의 친할아버지로서 그의 묘에는 제각이 설치되고 여러 가지 석물들과 신도비가 세워졌습니다. 신도비의 비문은 1851년에 철종이 직접 짓고 조인영이 글씨를 썼으며 이후 철종은 정기적으로 할아버지 은언군의 제각을 찾아 참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겨난 지명이 제각말, 또는 잿말이라는군요.


그러나 이 같은 호사도 잠시, 은언군의 제각은 6·25 때 불타 없어졌고, 육칠십 년 대 개발 광풍을 타고 그의 무덤은 파헤쳐졌으며 무덤을 지키던 석물들이며 묘비와 신도비 또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신도비는 현재 구파발역 근처에 있는 모 사찰 창건주의 송덕비로 둔갑해 있고, 장군석과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등은 창건주의 무덤을 지키고 있으며, 묘비는 그가 사약을 받은 것이 천주교와 연관이 있다고 해서 현재 절두산 성지에 옮겨져 있습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은언군의 묘는 효종과 현종 숙종 등 40여 년간 4명의 임금을 모셨던 상궁 옥구 임 씨 묘비 근처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습니다. 혹시나 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석물들을 기웃거려보지만 글자들은 대개 마멸이 심하여 알아볼 수가 없고 또 땅속 깊이 처박혀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니 혹시라도 남아있을지 모를 은언군의 흔적 찾기는 어려운 일 중에 어려운 일입니다.

임 상궁 묘비 근처에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는 진실을 알고 있겠거니 하고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상선 노윤천의 묘를 향해 발걸음을 돌립니다. 본래 이말산의 남동쪽 기슭에는 여러 성씨의 가족 묘역과 내시, 궁녀, 역관, 의원, 여항 시인 등의 수많은 무덤이 산재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조선 숙종 영조 연간에 활약했던 위항시인 창랑 홍세태의 묘가 이곳 이말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창랑 홍세태는 평생을 불우하게 살다 간 천재 시인이었습니다. 대대로 역관 무인 등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이씨 집안의 노비였으므로 그 역시 노비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5살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시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던 까닭에 그의 이런 재능을 알아본 청성군 김석주와 동평군 이항이 은자 200냥을 내어 그를 속량 시켰다는 일화가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실려 있습니다.


성품이 강개하여 자신을 무시하거나 오만하게 구는 자에게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았으며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 할 수 있는 김창흡, 이규명 등과 신분을 초월한 망형지교를 맺었습니다. 23세 때 식년시 잡과에 응시하여 한역관(漢譯官)으로 선발되었고, 1682년 통신사 부사 이언강의 자제군관으로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일본 사행 길에는 시와 그림으로 실력을 마음껏 뽐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미천한 신분과 강개한 성품은 평생의 족쇄가 되어 그의 앞길을 막고 가난에 허덕이게 했습니다. 물론 같은 중인 출신으로 내수사에 들어가 부를 축적했던 임준원의 도움도 받았고, 또 김석주, 김창협, 김창흡, 홍상한, 최석정 등 당시의 명문 세도가들로부터도 일정 부분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가난했고 늘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의 자전적 시 「염곡칠가」중 두 번째 노래에 가난에 대한 그의 안타까운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아내여, 아내여! 그대와 혼인한 후로 [有妻有妻自結髮]

온갖 근심 속에서도 금슬만은 좋았다오 [百事傷心但琴瑟]

씀바귀 먹고도 냉이 먹은 듯 성난 기색 없었으니 [食荼如薺無慍色]

그대 아니었으면 어찌 오늘의 내가 있었겠소 [微子吾能得今日]

손톱만큼도 보답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나니 [愧無寸報慰餘生]

다만 죽어 함께 묻히기만을 기약한다오 [獨有前期指同穴]

아아, 두 번째 노래여, 노래 참으로 슬프니 [嗚呼二歌兮歌正悲]

가련한 이내 뜻을 하늘은 아실는지? [此意可憐天或知]


창랑 홍세태의 초상화. 일본 타카츠키 칸논노사토 역사민속자료관 소장으로 1883년 아시카곤사이(安積艮齋)가 예전 초상화를 구해 모사한 것이다.

가난한 데다 자식 복마저 없었던 홍세태는 끝내 아들을 두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출가한 두 딸도 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불행도 그의 시작(詩作)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시는 어려운 글자나 전고를 사용하지 않고 화려한 수사와 미사여구를 구사하지 않았지만 일상 속에서 겪는 삶의 애환을 진솔하게 표현하여 보는 이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문집을 출간하기 위해 돈을 저축해두고 있었는데 이를 두고 이덕무는 "어찌하여 살아있을 적에 은전 70냥으로 돼지고기와 좋은 술 등을 사서 70일 동안 즐기면서 일생동안 주린 창자나 채우지 않았는가?" 하고 그 어리석음을 꾸짖었다고 하나 그 자신 『맹자』를 팔아서 식구들의 양식을 마련했던 아픔이 있는 사람인지라 어찌 그것이 본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겠습니까?


홍세태의 문집 『유하집』은 그의 사망 6년 후에 사위 조창회와 문객 김정우에 의해 14권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이 문집에는 부(賦) 3수, 시(詩) 1627수, 문(文) 42수 등 모두 1670여 수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생전에 직접 쓴 서문에는 식암 김석주와 농암 김창협 같이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제대로 평가해줄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서문을 짓는다고 하였으니 그의 문학적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편『유하집』말미에 첨부된 정래교의 묘지명에 따르면, 홍세태는 1725년 을사년 정월 보름, 향년 7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으며 양주 이말산 신혈리 남동쪽 언덕에 장사 지낸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인 이씨 역시 3년 후에 사망하여 남편 옆에 묻혔습니다. 후에 영조 때의 문신 조현명은 창랑 홍세태에 대해, "간이 최립과 더불어 조선의 빼어난 위항시인으로 한유, 유종원과 자웅을 겨룰만하다"라는 평을 남겼으며, 그의 묘가 아무런 표지도 없이 필부들의 무덤에 뒤섞여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여러 사대부들과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시인 창랑 홍세태의 묘'라고 새긴 묘표를 세워주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창랑 홍세태의 묘는 흔적도 없고 묘표 또한 간 곳을 알 수 없습니다. 평생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신분적 한계와 가난의 굴레를 오로지 뛰어난 문학적 성취 하나로 헤쳐나갔던 창랑 홍세태, 그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불의와 타협하고 굴복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기만을 묵묵히 참고 기다렸습니다. 흡사 소금 수레를 끌며 태항산을 오르는 천리마처럼 언젠가 백락을 만나 우렁찬 울음을 터트릴 그날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끝으로 그의 시 「염곡칠가」 중 제1수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객이여, 객이여! 그대의 자(字)가 도장(道長)이라지 [有客有客字道長]

스스로 이르기를 평생의 뜻 강개하였다지만 [自謂平生志慨忼]

만 권의 책 읽은 게 무슨 소용 있나? [讀書萬卷何所用]

늙고 나니 웅대한 포부도 풀숲에 떨어졌네 [遲暮雄圖落草莽]

누가 천리마에게 소금 수레를 끌게 했던가? [誰敎騏驥伏鹽車]

태항산이 높아서 올라갈 수 없구나. [太行山高不可上]

아아! 첫 번째 노래여, 노래 부르려 하니 [嗚呼一歌兮歌欲發]

뜬구름이 밝은 해를 가리는구나 [白日浮雲忽陰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