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당의 북한산 이야기 7
무당을 그렇게 가까이서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산골에서 태어나 50년이 넘게 살았으니 굿 구경 한 번 못 해 봤다는 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참말로 무당 근처엔 얼씬도 안 하고 살았다. 궁금증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린 시절부터 뇌리에 각인된 무당은 무서움 그 자체였다. 왜 그랬을까? 오방색의 화려한 무복을 입고 날 선 작두 위에서 춤을 추는 그 신기(神氣)에 기가 질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어 보는 신통력에 소름이 돋았던 것일까? 그러나 그런 것들보다는 아무래도 무당이 귀신과 소통하고 귀신의 목소리를 흉내 낸다는 그 참을 수 없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한동안 상가(喪家) 음식을 못 먹을 정도였으니 귀신에 대한 나의 두려움은 정말 상상 그 이상이었다.
↑금성당 본당 내부 전경 I 전면에 금성당의 주신인 금성도가 걸려있다. 금성님이 화려하게 장식한 적토마를 타고 활 통을 어깨에 맨 채 양손으로 활을 잡아당기고 있다. 길게 뻗은 두 가닥의 꿩 털로 장식한 갓을 쓰고 홍 철릭을 입고 흰색 띠를 허리에 둘렀다. 4명의 호위병이 금성님을 에워싸고 있다. 현재의 금성도는 분실되었던 것을 최근 양종승 박사(샤머니즘 박물관장)가 사재를 들여 복원한 것이다.
서울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인근에 있는 이말산을 답사하던 중 금성당에 들러 담당 학예사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금성당은 서울시 은평구 진관 2로 57-23에 위치한 무속 신당으로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주신으로 모시고 있다. 금성대군은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나 8세 때 금성군에 봉해졌으며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맞서 단종의 복위 운동을 추진하다 실패하여 32세의 젊은 나이에 사사(賜死)된 비운의 왕자이다. 건물은 1800년대 후반의 것으로 약 15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조선시대 궁중에서 후원하여 건립된 무속 신당으로는 오늘날까지 본래 터에 옛 모습 그대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신당이다. 본당과 하당으로 이루어진 신당은 ㄷ자형의 건물이 ㄱ자형의 살림집과 신당 앞의 마당을 공유하며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놓여있다. 금성대군은 금성당 주신으로 모셔지면서 금성왕이라고 칭해졌다.
대군이 왕으로 신격화된 것은 민중들에게 국왕 못지않은 추앙적 인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인데, 이는 영조 41년(1765년)에 나라에서 금성대군을 봉사하는 혈손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고, 또, 정조 15년(1791년)에 금성대군을 국가적 추증 대상자로 지정하여 배향하게 되자 민중 신앙 속에서도 본격적으로 추모되었다. 본래 서울에는 구파발을 비롯한 노들(망원동), 각실점(월계동) 등 세 개의 금성당이 있었으나 1970년대 이후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려 모두 사라지고 현재는 유일하게 구파발 금성당만 남아있다. 구파발 금성당은 원래 윗 금성당과 아랫 금성당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폭포동 근처에 있었던 윗 금성당은 없어지고 아랫 금성당만 은평 뉴타운 아파트 숲에 둘러싸인 채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구파발 금성당은 2008년 7월, 국가 민속문화재 제258호로 지정되었으며, 본래 지킴이(시봉자)는 4대째 가업을 이어온 송은영 여사(1925년 생)였는데 은평 뉴타운 개발과 함께 은평구에 귀속되어 2016년 5월 25일 샤머니즘 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본래 금성당에는 단골들이 많아서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굿이 쉴 새가 없었으며, 정월 홍수맥이를 시작으로 음력 3월 24일 금성님 탄신일 맞이, 칠석맞이 등 사시사철 중요한 행사들이 이어졌다고 한다.
↑댄주굿 I 댄주굿은 민족 시조 단군을 모시는 큰 굿으로 큰 거리 또는 상산거리라고 한다. 고려 충신 최영 장군을 비롯한 별상, 신장, 대감 등을 차례로 모신다. 별상을 모실 때는 삼지창과 언월도로 육사실을 바치고, 신장을 모실 대는 오방신장기를 뽑으며 이어 흥겨운 대감 춤을 추고 창부타령을 부르면 안주로 군웅 대감, 몸 주대 감, 벼슬 대감 등을 대접한다.
2017년 5월 20일, 「2017 금성대군 탄신맞이 금성당제」를 보기 위해 금성당을 다시 찾았다. 아침 열 시부터 시작된 행사는 황토물림, 주당물림, 이말산 혼맞이를 시작으로 간략한 유교식 제례에 이어 산맞이, 서낭맞이, 금성왕굿, 댄주굿, 무감서기, 대신말명, 군웅, 성주, 창부 등의 굿거리를 거쳐, 이말산 궁인 및 제당 배웅, 뒷전을 끝으로 긴 일정을 마무리했다. 참가한 무당만 해도 스무 명이 넘고 거기다 악공이며 음향시설 담당자, 촬영 담당자 등등 족히 삼십 명이 넘는 대부대에다 종교학과 교수, 학생, 문화재 전문위원, 무형문화재, 그리고 지역 주민들까지 그다지 넓다고 할 수 없는 금성당 안마당은 하루 종일 사람들로 북적였다.
빼곡히 들어찬 관객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난생처음 굿 구경을 했다. 여름 같은 봄 날씨인지라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도 옷에 땀이 배는데 여러 겹의 무복을 걸쳐 입고 고깔이며 갓을 쓴 채 굿거리를 진행하는 무당들의 노고야 말해 무엇하랴. 다행히 굿 구경을 하는 내내 지금껏 갖고 있었던 무당에 대한 두려움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금성당제가 비록 신앙의례이기는 하지만 굿 자체의 연희성과 지역민 전체의 축제에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들의 언어는 유쾌하고 발랄하였으며 이른바 신들린 사람에 대한 께름칙함보다는 공연가나 예술가로서의 친근감이 더 느껴졌다. 오히려 무복을 벗고 객석에 앉아있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도 평범해 보인다는 점이 나를 당황케 할 정도였다. 도깨비 뿔이 달린 사람이라도 연상했던 것일까? 그들이 늘어놓는 사설들은 대부분 참가자들의 무병장수, 입신양명을 빌고 지역민들의 안녕과 국운융성을 비는 것이었지만 익살과 해학이 곁들여져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설 중간에 느닷없이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등과가 같은 구호가 튀어나와서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장소가 너무 협소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지는 일정 때문에 전 과정을 지켜보기 어렵다는 점 외에도 제물로 바친 음식들 중 일부는 보는 이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때부터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하지만 21세기 생명존중의 시대를 맞이하여 굳이 명분 없는 전통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비록 사소하기는 하지만 이런 점들을 보완하여 좀 더 민중 속으로 다가간다면 무교 역시 단순히 버려야 할 구습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의 오랜 역사와 함께 해온 전통 신앙으로서 그 당당한 지위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