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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당 이종헌 Oct 19. 2017

북한산 둘레길에서 만난 바위글씨  '산성정계'

현해당의 북한산 이야기 9

북한산 둘레 캠핑장에서 삼천교 쪽으로 이동하며 바라본 산성정계 바위글씨. 오른 쪽 하천은 진관천이다.

연인원 6백만 명 이상이 이용하는 북한산 국립공원은 세계에서 단위면적당 탐방객이 가장 많은 국립공원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백운대, 인수봉, 자운봉, 선인봉 등 멋진 화강암 봉우리와 우이동, 구기동, 북한동 등의 수려한 골짜기를 품에 안고 있으니 이천만 인구가 북적이며 살아가는 수도권에 이만한 휴식처가 있다는 것은 실로 자연이 우리에게 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북한산 국립공원 내에는 이름만 들어도 금방 알 수 있는 유물, 유적이 즐비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비류, 온조가 태자(유리)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행하니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땅을 찾았다"라고 하였는데, 그 부아악이 이곳 북한산 국립공원 내 만경대 혹은 인수봉이라는 설이 있다.


비봉에는 국보 3호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비록 모조품이기는 하지만, 의연한 자태를 뽐내고 서 있고,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신라의 화엄 십찰 중 하나인 청담사도 이곳 북한산에 위치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 때는 이곳에 중흥산성을 쌓아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방비하였고, 신혈사, 향림사, 삼천사, 문수사, 승가사, 태고사 등 유서 깊은 사찰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어 고려 불교 중흥의 요람으로 일컬어지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숙종 37년(1711) 신묘년에 이곳에 북한산성을 쌓아 유사시에 대비한 왕과 백성의 피난처로 삼았다. 실제 피난처로 이용된 적은 없었으나 오늘날 일상에 지친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이곳을 찾아 삶의 활력과 원기를 회복해 돌아가니 이만하면 숙종의 혜안 아닌 혜안에 박수를 보낼 만도 하다.  


이처럼 많은 문화 유산이 존재하는 북한산 국립공원은 지난 2010년에 완성된 둘레길 덕분에 시민들 편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2012년 기준으로 둘레길 이용객만도 연 300만 명을 상회한다고 한다. 필자도 가끔씩 짬을 내어 둘레길을 걷곤 하는데 전체 20개 구간 중 가장 선호하는 구간은 제8코스 '구름 정원 길'이다. 북한산초등학교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내시 묘역과 백화사를 지나 진관사 생태공원 쪽을 향하여 걷노라면 무엇보다 평탄한 길과 진관천시원스러운 물줄기가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지난 4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그날도 느지막이 '구름 정원 길' 산책에 나섰다. 따사로운 봄 햇살과 사방에 가득한 꽃과 나무들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은 도원경을 연상케 했다. 산매화와 진달래 홍 목련 백목련에 취해 느릿느릿 길을 걸어가는데 문득 둘레길 바로 옆 암벽에 희미한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무심코 지나치려 했으나 왠지 덫에 걸려 신음하는 산짐승의 애절한 눈빛 같은 것이 느껴져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한 글자 당 가로 30㎝, 세로 20㎝ 정도 크기의 큼지막한 바위글씨가 세로로 새겨져 있었다.

 

비록 마지막 글자의 하단부가 둘레 길 데크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 판독의 어려움은 있었지만 '山城㝎界(산성정계)' 네 글자가 분명하였다. 그러나 막상 '산성 정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돌 채취를 막는 '부석금표'나 소나무 벌채를 금하는 '금송' 표석은 본 적이 있으나 '산성 정계' 표석은 지금껏 그 존재가 알려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산성정계 바위글씨와 탁본 I 붉은색 화살표 부분에 바위글씨가 위에서 아래로 새겨져 있다.

며칠 후 조장빈, 배성우, 홍하일 등 한국등산사연구회 소속 회원들과 만나 탁본을 하고, 여러 차례의 토론을 거쳐 그것이 조선 숙종 46년(1720) 2월에 설치된, 북한산성 정계 표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전문가의 자문을 구했음은 물론이지만 무엇보다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박현욱 회원이 찾아낸 『승정원일기』 숙종 46년(1720) 2월 15일 자의 다음 기사 때문이었다.


인접(引接) 시에 지돈녕 민진원이 주달한 바, 북한산성 서문 밖의 한 골짜기가 버려진 채로 있어서 도제조가 농우(農牛)를 갖추어 주고 백성을 모집하여 개간하였으나 땅이 몹시 메마르고 거칠어서 수확량이 세금을 감당하기에도 부족하므로 농사짓고자 하는 이가 극히 적습니다. 남한산성 밖에도 또한 개간한 곳의 리(里) 수를 정하여 세금을 면제해주는 규정이 있으니 남북한이 마땅히 같아야 할 것입니다. 각 지방관에게 명하여 본성 별장과 더불어 직접 입회하여 5리를 한하여 정계(定界) 한 후, 정계 내에 있는 곳 중 산성을 쌓은 후에 개간한 곳은 남한의 예에 따라 세금을 감면해주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남한의 예에 따라 행하라 하였다.


물론 현재의 위치에 바위글씨를 새겼다는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위 『승정원일기』의 내용만으로도 그것이 북한산성 인근의 버려진 땅을 개간할 목적으로 새긴 정계표이 분명해 보인다.


이천만 수도권 인구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며 삶의 활기를 충전하는 북한산 국립공원, 그곳에는 아직도 버려진 채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유물, 유적이 너무도 많다. 향림사 터에 반쯤 얼굴을 파묻고 있는 맷돌이며, 탑신을 잃어버린 채 불구가 된 대지국사 터의 거북, 언제부턴가 산성내의 영험한 기도터로 변해버린 훈련도감 유영지, 그리고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이름 없는 민불(民佛)들. 어쩌면 오늘의 우리에게는 수많은 혈세를 들여 발전소를 짓고,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짓는 일보다 방치된 유물유적을 발굴하고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 더 시급한 것인지도 모른다.

 

거기에서 나오는 유형무형의 에너지가 우리 사회를 좀 더 밝고 아름답고 살기 좋은 세상으로 바꾸어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예산이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화 유산을 조사하고 발굴하며 유지 보수하는 데는 물론 많은 돈이 든다. 그렇더라도 정책담당자들과 관계기관이 좀 더 의지를 갖고 노력하며 지자체를 포함하여 각종 시민 사회단체들과도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강구한다면 오늘날처럼 이렇게 참담한 지경만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산성 정계 각자 발견을 계기로 무엇보다 북한산 국립공원 내에 산재한 유물, 유적의 발굴과 보존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 수립을 촉구한다.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인다는 말이 있다. 북한산의 역사와 문화 유산에 대한 관심이 북한산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우리 사회의 활력으로 이어지는 알고리즘이 형성되도록 모두의 지혜와 노력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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