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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당 이종헌 Oct 25. 2017

이옥의 길, 낭만의 길

현해당의 북한산 이야기 10

오래전 이야기다. 동호회 회원들과 운동을 마치고 뒤풀이를 할 때였다. 갑자기 나이 지긋한 회장님께서 엄숙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혹시 껌의 재료가 뭔지 압니까?”

“글쎄요? 고무 아닐까요?  

“나 수액이라는 얘긴 들었는데 갑자기 그건 왜요?”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껌 얘기로 집중되었다.

“나도 들은 얘긴데 고양이 뇌로 껌을 만든다는 소문이 있어서 말이에요...”

“예????”

“껌은 고양이 뇌로, 껌은 고양이 뇌로...”


깜찍한 율동과 함께 동요 ‘검은 고양이 네로’를 부르는 회장님 때문에 좌중이 발칵 뒤집어졌었다.    


비봉 능선에서 만난 검은 고양이. 의연한 자세로 산 아래 풍경을 굽어보는 포스가 남다르다.

세월이 지나도 어디서든 검은 고양이를 보면 문득 그때 일이 생각난다. 이옥(李鈺)의 기행문 「중흥유기」를 따라 북한산을 찾았다가 검은 고양이를 봤다. 등산객들에게 익숙해져서인지 사람을 봐도 피하지 않고, 널찍한 바위 위에 앉아서 산 아래 풍경을 굽어보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서 제법 그럴듯한 포스가 느껴졌다. 문득 까맣게 윤기가 흐르는 털을 한 번 만져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을 때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녀석은 곧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이옥은 조선 정조 때의 문인이다. 집안은 대대로 서족(庶族)이었고, 당색 또한 소북(小北)으로 내세울 것이 없었다. 1790년(정조 14), 30세 때 원자(元子)의 정호(定號)를 기려 실행한 증광시(增廣試)에서 생원 2등을 차지하여 늦깎이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당시 청나라 통해 들어온 다양한 명청 소품(소설, 수필류)에 심취해있던 그인지라 당송시대의 고문(古文)이 입에 맞을 리 없었다.    

  

성균관 유생으로 과거 급제라는 당면 과제를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이옥의 마음은 이미 고문을 떠나 명청 소품에 가 있었다. 명청 소품에 대한 탐닉은 곧 그의 문장으로 표출되었고 이에 대한 대가는 혹독했다. 1795년 8월과 9월, 정조는 두 번씩이나 이옥에 충군(充軍) 명령을 내렸다. 충군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군대에 징집되어 가는 것인데 아무리 한미한 가문이라도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는 양반이 군대에 끌려간다는 것은 극히 모욕적인 일이었다. 너무 지나친 처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정조의 입장에서 보면 성균관 유생의 글이 정통 고문체를 벗어나 저급한 소설체를 지향하는 것은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대 사건으로 반드시 바로잡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박지원, 김조순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사들도 한 때 명청 소품에 경도되었으나 결국 모두 반성문을 쓰고 고문으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이옥은 충군의 벌을 감수하면서 까지도 끝내 자신의 문체를 고치지 않았다.


1796년 2월, 경상도 삼가현(현 합천군)에 충군 중이던 이옥은 한양에서 열린 별시(別試) 초시에 응시해 당당히 수석을 차지했으나 정조는 또다시 그의 문체를 문제 삼아 꼴찌로 강등시켜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친상까지 당한 이옥은 고향으로 돌아와 3년 상을 치렀고 1799년 다시 삼가현으로 소환되어 갔다가 이듬해 2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이후로는 과거(科擧)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고향 남양(현재의 경기도 화성) 칩거하며 창작에만 몰두하였다. 


비록 한미하였으나 그의 집안은 재력이 상당했고, 또 출세에 대한 욕망도 져버렸으니 고향집 서재에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쓸 수 있었다. 군왕 정조의 거듭된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문체를 지켜낸 이옥, 그는 비록 당대 문단의 비주류요 이단아였지만 그의 문학에 대한 신념과 열정은 이후 우리 근대문학의 태동에 필요한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다. 그에게는 성균관 시절부터 평생 변치 않는 우정을 쌓아온 벗이 있었으니 곧 담정 김려(金鑢)이다. 김려는 이옥보다 여섯 살이 어렸지만 평생의 망년지우로서 이옥이 남긴 글들을 가려 뽑아 자신의 문집인 『담정유고』에 실었다. 이옥의 작품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이다.  

동국여도(19C초) 속의 연융도. 세검정, 승가사, 대남문, 대성문 등이 표시되어 있다.

그 이옥과 김려가 북한산성 유람에 나섰다. 때는 1793년(정조 17) 음력 8월 26일, 남들은 아직 단풍이 절정에 도달한 때가 아니라고 하였지만 그의 눈에 비친 북한산은 이미 붉을 대로 붉어 있었다. 석류꽃의 붉음과 산당화의 붉음과 꼭두서니의 붉음과 분꽃의 붉음과 성성이치마꽃의 붉음, 이옥의 눈에는 붉음도 다 같은 붉음이 아니었다. 이날 유람에 나선 일행은 같은 성균관 유생 민사응과 김려, 그리고 김려의 아우 김선 등 4인이었다. 각자 말, 또는 나귀를 타고 종을 거느린 채 떠난 2박 3일간의 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날, 아침 일찍 맹교(현재의 종로구 삼청동 정독도서관 근처)에 있는 김려의 집을 출발하여 자하동, 창의문을 거쳐 세검정을 돌아보고 승가사에서 점심을 먹었다. 다시 승가사를 출발하여 문수문(대남문), 대성문, 행궁, 중흥사를 돌아보고 태고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둘째 날인 27일은 태고사에서 아침을 먹고 용암문과 백운동 암문을 거쳐 상운사 계곡으로 내려가 염폭(현 개연폭포)를 구경하고 대서문, 서수구, 백운동문, 청하동문, 부왕사, 산영루를 구경하고 진국사에서 잤다. 마지막 28일은 진국사를 출발하여 다시 산영루를 돌아보고 동남소문(보국문)을 나와 손가장, 혜화문을 거쳐 맹교로 돌아왔다. 다만 첫날 북한 서남 소문(문수암문)을 이용해 산성으로 들어갔다고 한 부분에서,  본문에 따로 대남문이라는 명칭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이 문은 오늘날의 청수동 암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되면 이옥 일행은 승가사에서 비봉 능선을 타고 청수동암문을 거쳐 대남문, 대성문, 행궁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밟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옥의 『중흥유기(重興遊記)』와 여타 유산기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대부분의 유산기들이 여정(旅程)에 따른 기술을 택하고 있는 것과 달리  『중흥유기』는 글을 소재에 따라 14개의 독립된 조목으로 나누고 마지막에 <총론(總論)>을 추가하는 <세목화(細目化)>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황아영은 그의 논문 『이옥 유기의 미적 특성』에서 이를 ‘전체성에 대한 거부’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는데, 전체보다는 부분, 중심적인 것보다는 주변적인 것, 주류가 아닌 비주류를 추구함으로써 성리학과 고문이라는 전체성을 탈피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옥은 그의 유기를 「시일(時日)」, 「반려(伴旅)」, 「행리(行李)」, 「약속(約束)」, 「관해(官廨)」  「초첩(譙堞)」, 「정사(亭榭)」, 「요찰(寮刹)」, 「불상(佛像)」, 「치곤(緇髡)」, 「천석(泉石)」, 「초목(草木)」, 「면식(眠食)」, 「배상(盃觴)」 등 14개 조목으로 나누고 북한산성 유람 길에서 본 사찰, 승려, 창고, 누정, 성곽 등과 자연환경 등을 자신의 취향에 따라 어떤 것은 소략하게, 또 어떤 것은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승가사를 비롯한 북한산성 내 각 사찰의 규모라든가 승려들의 복식(服飾), 또  「병학지남(兵學指南)」, 「대장청도가(大將淸道歌)」 등의 범패(梵唄)를 소개한 것은 당시 북한산성 내 사찰의 현황과 승려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옥이 『 중흥유기』를 통해 자신의 문학관을 적극 피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 속의  사람을 짓되 사람 속의 시를 짓지 말며, 시 속의 경치가 되게 하고 경치 속의 시가 되게 해서는 안 된다.(作詩中人, 不可作人中詩。爲詩中景, 不可爲景中詩。)"라고 한 「약속(約束)」 조의 언급은 곧 다른 사람의 눈과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린 시를 쓰지 말고 자기만의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시를 쓰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해동지도(1750년대 초) 경도오부 속 북한산성의 모습.

『중흥유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총론」에는 이런 이옥의 개성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남들의 눈에 비친 호오(好惡)는 그 자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그 자신에게 있어 북한산은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신기하고 아름답다. 그는 「총론」에서 아름답다는 말을 무려 51회나 되풀이하고 있지만 글이 조금도 산만하다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아름다운 것은 백 번 천 번을 되풀이해도 여전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이옥의 글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오는 주말에는 북한산에 올라 이옥의 길을 따라 걸으며 깊어가는 가을을 시로 읊어보는 건 어떨까? 남이야 뭐라고 하든 나만의 빛깔과 언어로 빚은 시 말이다.

        

총론 [總論]     


바람은 건조하고 이슬은 청결하니  [風枯露潔]

팔월은 아름다운 계절이요 [八月佳節也]

물은 흐르고 산은 고요하니 [水動山靜]

북한산은 아름다운 경계일세 [北漢佳境也]

단아하고 멋진 벗들은 [豈弟洵美二三子]

모두 아름다운 선비이니 [皆佳士也]

이런 곳에서 이런 벗들과 함께하니 [以玆游於玆]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如之何游之不佳也]

자하동을 지나니 아름답고 [過紫峒佳]

세검정에 오르니 아름답고 [登洗劍亭佳]

승가사 문루에 오르니 아름답고 [登僧伽門樓佳]

문수문을 올려다보니 아름답고 [上文殊門佳]

대성문을 굽어보니 아름답고 [臨大成門佳]

중흥사 동구에 들어서니 아름답고 [入重興峒口佳]

용암봉에 오르니 아름답고 [登龍岩峰佳]

백운봉 아래를  굽어보니 아름답다 [臨白雲下麓佳]

상운사 동구도 아름답고 [祥雲峒口佳]

염폭은 더욱 아름답고 [簾瀑絶佳]

대서문 또한 아름답고 [大西門亦佳]

서 수구도 아름답고 [西水口佳]

칠유암은 더욱더 아름답고 [七游岩極佳]

백운동문과 청하동문도 아름답고 [白雲靑霞二峒門佳]

산영루는 더욱 아름답고 [山暎樓絶佳]

손가장(孫家莊)도 아름답다 [孫家莊佳]

정릉 동구도 아름답고 [貞陵洞口佳]

동성(東城) 밖 모래밭에서 [東城外平沙]

말달리는 이들을 보는 것도 아름답고 [見群馳馬者佳]

삼일 만에 다시 성 안에 들어와 [三日復入城]

푸른 발을 드리운 술집과 시장 [見翠帘坊肆]

붉은 먼지를 일으키는 말과 수레를 보니 더욱 아름답다 [紅塵車馬更佳]

아침도 아름답고 [朝亦佳]

저녁도 아름답고 [暮亦佳]

맑은 날도 아름답고 [晴亦佳]

흐린 날도 아름답고 [陰亦佳]

산도 아름답고 [山亦佳]

물도 아름답고 [水亦佳]

단풍도 아름답고 [楓亦佳]

돌도 아름답고 [石亦佳]

멀리 봐도 아름답고 [遠眺亦佳]

가까이 봐도 아름답고 [近逼亦佳]

불상도 아름답고 [佛亦佳]

승려도 아름답고 [僧亦佳]

아름다운 안주가 없어도 [雖無佳殽]

탁주가 또한 아름답고 [濁酒亦佳]

아름다운 여인이 없어도 [雖無佳人]

나무꾼의 노래가 또한 아름답다 [樵歌亦佳]

요약해서 말하면 [要之]

그윽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有幽而佳者]

밝아서 아름다운 곳도 있고 [有爽而佳者]

탁 트여서 아름다운 곳이 있고 [有豁而佳者]

높아서 아름다운 곳이 있고 [有危而佳者]

담담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有淡而佳者]

번잡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有縟而佳者]

고요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有䆗而佳者]

적막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다 [有寂而佳者]

어디를 가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고 [無往不佳]

누구와 함께 하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無與不佳]

아름다운 것들이 어찌 이처럼 많단 말인가? [佳若是其多乎哉]

나 이옥은 말한다 [李子曰]

아름답기 때문에 왔다 [佳故來]

아름답지 않다면 [無是佳]

오지 않았을 것이다 [無是來]

북한산성의 단풍. 백운대 아래 계곡이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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