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당의 북한산 이야기 11
일요일 오후의 느지막한 산행 길, 기울어가는 해를 벗 삼아 휘적휘적 산길을 오른다. 혼자이기에 조금은 쓸쓸한 느낌도 있으나 또 그렇기에 길 위에서 만나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다 정겹고 소중한 친구들이다.
오늘은 북한산성 행궁 터와 나한봉 일대를 둘러보기로 한다. 청수동 암문을 빠져나가 사모바위 근처에 이르면 이미 어둠이 깔릴 시각이지만 백중이 엊그제니 달님께서 보살펴주시리라. 산성입구로부터 산영루, 중흥사를 지나 행궁 터로 접어드니 그야말로 인적 없는 호젓한 산길이다. 1711년 북한산성 축성과 함께 유사시 임금의 보장처로 지어졌던 행궁은 약 200년의 영욕을 뒤로한 채 1915년 7월, 이틀간에 걸친 폭우에 무너졌다. 다행히 내전(內殿)만은 무사했다고 하나 그 후로 1925년 을축년 대홍수에 휩쓸려갔는지, 아니면 6·25 때 미군의 폭격으로 사라졌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친애하는 여러분, 이 곳의 여름 두 달은 항상 특별한 일이 없기 때문에 그저 우리가 할 일은 장마의 더위와 끈끈함을 견디며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일 년 중에 이때를 휴가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몇 년 전에 서울에서 10마일 북쪽에 위치한 북한산 언덕 위에 버려지고 반 폐허가 된 <행궁>을 더위를 피할 목적으로 리스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는 월세 내는 것을 대신해서 행궁을 수리 보존하기로 하였고 매년 여름 이 곳은 더위를 피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대한성공회 주교를 지낸 마크 트롤로프(Mark Trollope)가 1915년 모닝캄(The Morning Calm)지에 기고한 글이다. 그의 기고문과 함께 실려 있는 사진 속에는 행궁 대청마루에 기댄 채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는 성공회 신부들의 모습이 보인다. 퇴락한 행궁과 그 안에서 한가롭게 피서를 즐기는 신부들의 모습에서 망국의 비애를 느끼지 않을 자 그 누구랴?
여기저기 푸른색 천막으로 덮여있는 행궁지는 경기문화재단 북한산성문화사업팀의 주도로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행궁 복원이 꼭 필요한 일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나부터도 의문을 갖고 있으나 이왕 복원하기로 결정한 것이라면 시간과 돈에 구애받지 말고 최대한 원형에 충실한 작업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산영루도 그렇고 중흥사를 비롯한 북한산성 내 여러 사찰과 성곽, 성문 등의 복원된 모습을 보면 투박하면서도 중후하고 실용적이면서도 고풍스러운 우리 건축의 멋과 맛이 사라져 버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최근에 복원된 산영루(山影樓)만 봐도 옛 사진 속의 그것과 비교할 때 무언가 건물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옛 장인들의 혼이 사라진 기계적인 건축이요, 껍데기만의 복원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더구나 기껏 복원해놓고도 출입금지 팻말을 떡 하니 설치해 놓았으니 도대체 누구를 위한 누각이요, 무엇을 위한 복원이란 말인가? 새소리 물소리 산 그림자에 취한 나그네가 누각 위에 올라 <사철가> 한 가락 흥얼거릴 수 있는 풍류를 기대해 보는 건 진정 나만의 사치인가?
후드득 빗방울 듣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여기저기에서 떨어지는 도토리들의 교향곡이다. 행궁 터를 뒤로한 채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산길을 오르자 <청수동 암문 1.2㎞> 표지판이 나온다. 표지판이 가리키는 대로 길을 따라가면서 보니 북한산성의 여타 등산로에 비해 산세가 완만한 데다가 산성 내부의 계곡과 봉우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산성 종주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쉬엄쉬엄 남장대 지에 오르자 서쪽으로 의상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돌려 동쪽을 바라보니 대남문, 대성문, 동장대가 손에 닿을 듯 가깝고, 북으로 노적봉, 백운대, 만경대가 위풍당당 억만년의 위무를 뽐내고 서있다. 그 안에 동장대와 남장대, 북장대가 삼각형의 트라이앵글을 구축하고 있으니, 유사시 임금의 피신처로서 이만한 천혜의 요새가 또 어디 있을까?
나한봉에 올라 건너편 나월봉으로 이어지는 구간의 성벽을 바라보니 중장비를 동원한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지난겨울에 찾았을 때만 해도 성벽의 체성[몸통]부분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아마도 성가퀴[여장] 보수 작업을 진행하는 모양이다. 시야가 확 트인 봉우리 위에 앉아 북한산 남서쪽의 어려 봉우리들을 조망하다가 문득 아스라이 이어진 성곽 길 너머 어디쯤에선가 수줍게 미소 짓고 있을 성문(城門)에 생각이 가 닿는다.
북한산성에는 수문과 시구문을 제외하고 모두 13개의 성문이 있다. 1711년 축성 당시 12 성문이던 것이 1712년 중성문 건축으로 13 성문 체제가 이룩된 후 지금껏 변함이 없다. 이는 북한산성 관련 문헌에도 일관되게 나타나는데 그중 『북한지(北漢誌)』에만은 유독 14 성문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로부터 13 성문 설, 14 성문 설 등 다양한 주장들이 쏟아져 나와 오늘날까지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북한지』는 북한산성 축성 당시부터 약 30년 동안 승려들을 지휘하여 축성과 수비 임무를 총괄했던 팔도도총섭 성능이 저술한 것으로 도리(道里), 연혁(沿革), 산계(山溪), 성지(城地) 등 총 14개 조목으로 나누어 북한산성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을 빼놓고서는 북한산성을 논할 수 없을 만큼 그 영향력이 막강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혼란을 부추기는 주인공이 되고 말았으니 아무래도 이는 『북한지』의 역설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북한지』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현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북한지』의 체제를 보면 앞머리에 북한산성을 3장으로 나누어 그린 「북한도(北漢圖)」가 있고 다음에 14개 조로 이루어진 본문,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 성능의 발문이 있다. 성능의 발문에 “을축년 십일월 상한”이라는 간지가 있어 그것의 저술 연대가 1745년임을 알 수 있을 뿐 언제 판각이 되었는지, 또 저술 당시에 「북한도」가 함께 제작되었는지 아니면 나중에 제작되어 첨부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 없다. 다만 필자 개인적으로는 「북한도」가 나중에 제작되어 첨부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북한도」를 자세히 살펴보면 『북한지』에는 분명히 있다고 언급된 <북문>의 문루가 없다. 그리고 <소남문> 역시 그냥 암문이라는 표기만 있을 뿐 문루가 보이지 않는다. 이 <소남문>은 오늘날의 <대남문>에 해당하며 당시에 <문수문>으로도 불렸는데 이곳에 문루가 설치된 시기는 대략 1765년 경이다. 그렇다면 <북문>의 문루가 사라진 시점부터 <대남문>의 문루가 세워지기 전까지가 바로 「북한도」의 제작 시기가 아닐까? 『비변사등록』에 1764년 11월, 북한산성 북문이 방화에 의해 불탔다는 기록이 있고 또 이듬해 4월, 북문의 문루를 건설할 목재와 기와를 이용하여 문수문에 새로운 문루를 세우자는 주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한도」의 제작 시기는 대략 1765년경으로 추정되며, 이는 성능이 발문을 쓴 때로부터 무려 20년이 지난 후이다.
「북한도」가 『북한지』 보다 20년이나 늦게 제작된 것이라면 「북한도」에는 『북한지』의 성문이 어떻게 그려져 있을까? 북문, 대동문, 대서문, 대성문, 중성문, 소동문, 소남문, 서암문, 백운봉암문, 용암봉암문, 동암문, 청수동암문, 부왕동암문, 가사당암문 등 『북한지』의 14 성문 중에서 「북한도」에 표시된 것은 대동문(동문), 대성문, 중성문, 북문, 서문 등 5개 대문과 소남문(암문), 서암문(암문), 백운봉암문(암문), 용암봉암문(암문), 청수동암문(암문), 부왕동암문(암문), 가사당암문(암문) 등 7개의 암문(暗門)이다. 모두 12개로 나머지 소동문과 동암문은 표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대성문과 대동문(동문) 사이와 나한봉과 나월봉 사이에 암문 형태의 그림 두 개가 그려져 있어서 이것을 성문으로 간주한다고 할 때 대성문과 대동문(동문) 사이의 성문은 동암문, 즉 오늘날의 보국문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 나한봉과 나월봉 사이의 성문은 소동문이 되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나한봉과 나월봉 사이에는 산성 축조 당시부터 성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필자가 직접 이 구간을 답사하며 일일이 살펴본 결과도 그렇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의 북한산성 보고서를 봐도 이곳에 성문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마니시류는 이 보고서에서 『북한지』의 14 성문이 13 성문으로 바뀐 것을 두고 1개의 성문이 폐쇄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이는 근거 없는 억측일 뿐, 차마 『북한지』의 오류 가능성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한편 그의 보고서는 짧은 조사 기간 탓인지 대성문을 대남문으로 보고, 보국문을 소동문으로 보는 등 오히려 북한산성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킨 측면이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축조 당시부터 북한산성에 14 성문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능은 왜 이처럼 중대한 실수를 범했던 것일까? 그것도 30년 이상을 산성에 머무르며 산성의 축조와 수비에 관여했던 장본인이기에 이 같은 실수는 더욱 용납하기가 힘들다. 이마니시류의 생각처럼 차라리 1개의 성문이 폐쇄된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산성 축조 당시의 『금위영등록』, 『어영청등록』, 『훈국등록』, 『비변사등록』 등 각종 문헌자료를 아무리 뒤져봐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북한지』 이후의 기록인 『만기요람』(1808)에 14 성문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는 『북한지』의 기술을 그대로 따른 것일 뿐, 1785년 왕명으로 직접 북한산성을 답사하고 돌아와서 쓴 안찰어사 신기(申耆)의 서계(書啓)에도 분명 13 성문만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성능은 왜 이 같은 착오를 일으켰던 것일까? 그 비밀의 열쇠는 바로 대성문(大城門)에 있다. 한자 ‘大成門’으로도 표기되는 북한산성 대성문은 1720년대 후반부터 문헌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이 문은 산성 축조 당시에 건립된 것이 아닐뿐더러 그렇다고 축조 이후에 건립된 것도 아니다. 기존에 있던 문의 이름이 바뀌었던 것인데 여기서부터 명칭의 혼란이 일어났다. 도성에서 이동하기에 가장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유사시 임금이 이 문을 통하여 산성으로 피신하는 계획이라도 수립되었던 걸까? 아무튼 대동문의 지위를 격상하여 대성문으로 바꾸면서 소동문이 대동문으로 바뀌는 연쇄적 명칭 변경이 일어난 것이다. 대동문이 대성문으로, 소동문이 대동문으로 변경된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축조 당시의 기록들과, 「금위영 이건기 비」, 그리고 현재 성벽에 남아있는 명문(銘文)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동문이 대성문으로 바뀌면서 소동문이라는 명칭은 마땅히 사라졌어야 옳다. 하지만 성능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하나의 문에 2개의 이름을 부여하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으니 『북한지』에 등장하는 소동문과 대동문은 이름만 다를 뿐 결국 하나의 문이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북한도」의 제작자는 이 소동문의 위치를 찾지 못한 채 나한봉과 나월봉 사이에 다소 애매한 형태의 성문 표시를 남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겠지만 이것 말고 다른 가능성은 없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얕은 지식에서 비롯된 견해이니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고 또 꼭 그렇게 되길 바란다. 어찌 보면 북한산성 14 성문의 비밀은 성능이 우리에게 던진 화두(話頭)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풀릴 듯 풀리지 않는 비밀의 문을 드나드는 사이 우리 모두 열렬한 북한산성의 신봉자가 되고 마니 말이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있다 보니 해는 어느덧 서산에 지고 사방에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나 대남문으로 향한다. 아무리 달빛이 좋다지만 사모바위 승가사 길은 왠지 무서울 것 같다. 어디선가 까악까악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