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당의 북한산 이야기 12
월요일 아침부터 방화 소식을 전하게 되어 유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250년 전인 조선 영조 때 이야기니 너무 놀라지는 마시라.
조선 영조 40년(1764) 11월 11일 밤 북한산성 북문에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성문과 2층 누각이 몽땅 불타버렸으니 당시 북한산성 관리 업무를 맡고 있던 총융청은 다음날 이를 즉시 영조에게 보고했다. 북한산성 관리 업무는 본래 경리청에서 맡고 있었으나 1747년(영조 23) 군영체제의 정비에 따라 경리청이 폐지되면서 업무가 모두 총융청(摠戎廳)으로 이관되었다. 때는 조선 영조 40년(1764) 11월 12일 아침이다,
총융사 구선복(具善復)이 부리나케 입궐하여 어전 숙배를 했다.
“전하께 아뢰오. 북한산성 관성장(管城將)이 보고하기를 어젯밤에 북문에 불이 나서 성문과 누각이 모조리 불에 타버렸다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란 영조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불이 저절로 났을 리는 없고 혹, 누가 방화를 한 것이오?”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갑자기 미쳐서 제정신을 잃은 자가 그리하였다 하옵니다.”
“허허 이런 고얀.... 미침 병을 앓는 자가 무슨 까닭으로 불을 질렀단 말이오?”
“방화 죄인 한도형(韓道亨)을 잡아다가 신원을 조사해 보니 일찍이 훈국(訓局)의 포수(砲手)였으나 미침 병이 있어 군안(軍案)에서 삭제된 자라고 합니다.
“뭣이라? 지난 신사년(1761) 동가(動駕) 때만 해도 군기가 엄격하여 선왕께서 이룩하신 금성탕지의 면모가 엄연하였거늘 갑자기 이런 해괴한 사건이 벌어졌으니 관성장은 누구며 도대체 수하 장교며 군졸들은 무엇을 했더란 말이오?”
총융사 구선복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모든 것이 소신의 불찰이옵니다. 관성장은 전 경기 수사 조제태(趙濟泰)이온데 북한성의 북문은 깊숙이 무인지경에 있어 이전부터 굳게 잠그고 평상시에 열고 닫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출입이 없다고 경계를 게을리하다니 이는 병가(兵家)의 가장 금하는 바가 아니오?”
진노한 영조는 손바닥으로 연신 어탁(御卓)을 내리치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막중한 보장의 땅을 관장하는 자가 한갓 잡인(雜人)의 출입 하나를 엄금하지 못하여 이렇게 중차대한 사태를 야기하였으니 일의 놀라움이 이보다 심할 수 없사옵니다. 관성장 조제태를 우선 삭탈관직하고, 잘 관리하지 못한 죄를 의금부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며 성에 소속된 담당 장교는 무거운 곤장으로 징계하겠습니다. 방화 죄인 한도형은 범죄가 지극히 무거우므로 신의 영에서 감히 처단하지 못하오니 형조에 이송하여 더욱 엄하게 조사하여 벌을 내리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그리 하시오.”
『비변사등록』 영조 40년 1764년 11월 12일, 총융청의 계(啓)를 바탕으로 당시 사건을 재구성해 본 것이다. 북문에는 본래 훈련도감 소속의 문지기 2인이 교대로 번을 서도록 되어 있었으나 북문 자체가 북한산성 내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에 있어 이전부터 굳게 잠그고 평상시에 열고 닫는 일이 없었다고 한 것을 보면 방화 당시에는 그야말로 문지기도 없는 무인지경이었던가 보다. 아무튼 이 어처구니없는 화재로 애써 지은 북한산성 북문과 문루가 몽땅 타버렸으니 이로부터 북문은 축성 당시 5 대문 중 유일하게 문루 없는 대문이 되고 말았다.
방화 이후 북문의 문루를 다시 세우려는 계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 소용되어야 할 자재들이 엉뚱하게도 다른 곳에 쓰이고 말았으니 이는 또 어찌 된 사연일까? 다시 그때로 돌아가 보자.
때는 조선 영조 41년(1765) 4월 20일, 문신 삭시사(文臣朔試射)에 입시한 총융사 구선복(具善復)에게 영조가 하문하였다.
“북한산성 북문 공사는 어찌 되고 있소?”
“예, 전하. 북한산성의 북문루(北門樓)는 현재 경영하여 고쳐 세우고 있으나 그 문은 높은 산봉우리 위에 위치하여 단지 나무꾼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도성으로 말하면 숙정문(肅靖門)은 곧 북문으로서 처음부터 문루가 없었으니, 북한산성 북문의 문루 또한 그리 긴요한 것은 아닙니다.”
“무어라? 하루빨리 문루를 세워 옛 체모를 회복해야 하거늘, 이 일이 긴요치 않다면 더 무엇이 긴요하단 말이오.”
“송구하오나 전하. 지난 신사년(1761)에 전하께옵서 산성을 다녀오신 이후 대성문(大成門)을 영구히 폐쇄하고, 문수문[현 대남문]을 정문(正門)으로 삼았으니 문수문의 일이 전보다 훨씬 중하게 되었습니다.
“허허, 문수문의 일을 내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재원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전하, 병법에서 높이 치는 것이 또한 임기응변의 전술이오니 금번 북문 문루를 세울 목재와 기와로 문수문의 문루를 새로 건립하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총융사 구선복의 주청에 영조가 파안대소하며 무릎을 쳤다.
“역시 총용청의 수장답구려. 참으로 좋소. 당장 그리하시오.”
문신 삭시사(文臣朔試射)란 조선시대, 당하관(堂下官)의 문신으로서 군직을 가진 사람에게 매월 초하루마다 보이던 궁술(弓術) 시험을 말한다. 아무튼 이리하여 북문 문루 복구 작업에 쓰일 자재들이 대남문 문루 공사에 쓰이고 말았으니 이로부터 소남문, 문수문, 암문 등으로 불리며 홀대 아닌 홀대를 당해왔던 대남문이 화려한 문루를 머리에 이고 일약 북한산성의 정문으로 등극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다. 18세기에 제작된 북한산성 지도 중에 「동국여도」를 보면, 북문은 문루 없이 ‘암문’으로만 표시되어 있고 그동안 ‘암문’ 또는 아예 명칭 표기마저 없었던 대남문은 ‘대남문’이라는 표기와 함께 당당히 문루가 그려져 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더니 사람의 일만 그런 것이 아닌가 보다.
그나저나 방화 죄인 한도형의 처지는 어찌 되었을까? 더 이상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나라의 중한 시설을 훼손했으니 아마도 중형을 면치 못했으리라. 한도형이 비록 미침 병이 있었다고 하나 훈국 포수 자리에서 쫓겨난 억울함 또한 방화의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니 아무쪼록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의 억울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 위정자들의 급선무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