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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당 이종헌 Nov 11. 2017

승려들이 뿔났다

현해당의 북한산 이야기 13. 북한산성 비석거리와 북한 승도 절목

북한산성 중성문을 지나 중흥사 가는 길에 산영루가 있다. 이 산영루는 1915년 대홍수 때 무너진 것을 지난 2014년 복원한 것인데 가을이라 계곡의 수량이 줄어든 탓에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물줄기의 장관을 감상하기는 어려우나 계곡의 흰 바위와 붉은 단풍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운치가 제법이다. 산영루 뒤편은 일명 비석거리로 예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비석들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약 20여 기 정도만 남아있다. 비석은 대부분 1800년대의 것들로 그 주인공은 북한산성 관리 업무를 맡았던 총융청 수장들이다. 본래 이곳에는 숙종의 북한산성 시를 새긴 어제 비각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나마 1900년대 초 이곳을 방문한 어느 독일인 장교의 사진 속에 그 모습이 남아있어 옛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사진설명] 북한산성 내 비석거리와 산영루(山映樓) 전경을 찍은 흑백 원판 필름. 1906~7년 한국 등을 방문한 독일 장교 헤르만 산더(Sander, Hermann Gustav Theodor ; 1868~1945)가 일본인 사진작가 나가노(Nakano)를 고용하여 촬영한 필름 자료이다. @국립 민속박물관 제공. 사진 우측에 숙종의 어제시를 새긴 ‘어제 비각’이 보인다. 숙종은 1712년 4월 이곳 북한산성을 방문해 성첩을 두루 관람하고 시 6수를 지은 바 있다.


이밖에도 비석거리에는 1885년 북한산성 주둔 승려들에 의해 제작된 「북한 승도 절목(北漢僧徒節目)」이라는 325자의 바위글씨가 있어 이곳을 찾는 탐방객들의 눈길을 끈다.       


「북한 승도 절목」은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북한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승려들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인 ‘총섭’의 선출 방식을 정하여 바위에 새긴 것으로 이는 산성 내에 거주하는 승려 중에서 총섭을 임명하던 관행을 깨고 외부의 승려를 총섭에 임명하는 사태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내용으로는 우선 북한산성 총섭을 산성내의 승려 중에서 선발하여야 하는 당위성과 함께 구성원들의 비밀 투표를 통한 총섭의 선출 규정, 그리고 외부인이 총섭에 임명되었을 때의 대응방식 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산성에는 언제부터 어떤 목적으로, 또 얼마나 많은 승려들이 거주했던 것일까?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북한산성은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중흥산성(中興山城)이 축성되었고 승가사 문수사 삼천사 향림사 중흥사 태고사 등의 사찰이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 숙종 때 옛 중흥산성을 토대로 축성된 북한산성은 축성 당시부터 많은 승려들이 공사에 투입되었다. 이들이 담당했던 일은 주로 산성 내에 건물을 짓는 일이었는데 북한산성 축성으로 산성 내에는 모두 11개의 사찰과 행궁, 그리고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 산영루 등 여러 개의 누대가 들어섰다.      

경기도 기념물 제223호 산영루. 1915년 대홍수에 무너진 것을 지난 2014년  국비 3억5천만 원과 시비 1억5천만 원 등 모두 5억 원을 들여 복원하였다.

승려들이 산성 축성 공사에 참여한 것은 이미 남한산성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들은 사찰이나 행궁, 문루 등을 건설하는 데 있어 최고의 기술력을 갖춘 건축 전문가들이었다. 초창기 북한산성의 승려들을 지휘했던 팔도 도총섭 성능(聖能)이 남한산성을 수축할 당시 승도들을 지휘했던 벽암 각성의 손 제자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벽암 각성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구례 화엄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축 전문가였는데 벽암 각성이 이루지 못한 화엄사 각황전 중창 불사를 성사시킨 인물이 바로 계파 성능이다. 한편 국보 제67호인 화엄사 각황전 중건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가 대시주로 참여한 사실이 「각황전 중건 상량문」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런 인연 때문인지 성능은 팔도 도총섭이라는 승군 최고의 지위에 올라 북한산성의 축성을 지휘했다.                     

성능이 쓴 『북한지』에는 북한산성 승영(僧營)에 도총섭을 포함한 70여 명의 장교와 350명의 의승이 11개의 사찰에 분산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이 같은 체제는 시대별로 다소의 증감이 있지만 끝까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창기 이들 승병들은 각 지역별로 인원을 할당하여 2개월마다 교대하는 의승상번제(義僧上番制)로 운영되었으나 영조 31년(1755) 호남 이정사(湖南釐正使) 이성중의 별단으로 방번전(防番錢)을 납부하는 의승방번제(義僧防番制)로 전환되었다. 의승방번제에 따라 북한산성에도 정기적으로 급료를 받는 승병이 둥장하는데, 1808년 서영보, 심상규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만기요람』 「군정 편」에 “북한산성 치영은 중흥사에 있으며 총섭 아래 중군승 1명과 장교승 47명이 있는데 모두 유급이며, 승군은 372명 중 73명이 유급이다.”라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북한 승도 절목」은 이들 유급 승려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결과물이다. 북한산성 승영의 우두머리인 총섭은 계파 성능 이래로 대대로 내부에서 임명되었으나 이런 규칙을 깨고 외부자가 총섭으로 임명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위의 『만기요람』 「군정 편」에 그에 대한 언급이 있다.


본시는 종전부터 거주하는 승려로 임명하였는데 정조 21년 정사(1797년)에 수원유수 조심태(趙心泰)의 계청에 의하여 용주사(龍珠寺)의 승려로 번갈아서 임명하게 하였다.     


한편 이옥의 중흥 유기(1793)에, 화산 용주사 총섭을 지낸 ‘호종 천교 정각 보혜 팔로 제방 대주지 팔도 승병 도총섭(護宗闡敎正覺普慧八路諸方大住持八道僧兵都摠攝)’ 사일(獅馹)이 북한 총섭을 맡고 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외부 인사가 북한 총섭에 임명되는 일은 만기요람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산 용주사는 1790년(정조 14), 승려 사일이 팔도 관민의 시전(施錢) 8만 7000여 냥을 거두어 갈양사 옛터에 창건한 절로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의 조포사 역할을 담당하였다.  사일 역시 각성, 성능 등과 같은 건축 전문가로 현륭원 조성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이런 사일을 정조가 모른 체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낙하산 인사가 문제다. 평생을 산성 수호에 받친 승려들의 입장에서 보면 외부 인사에게 총섭 자리를 뺏기는 것이 달가울 리 없지만 위정자의 입장에서야 아랫사람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결코 뿌리치기 어려운 달콤한 유혹일 수밖에 없다. 산영루 비석거리에 가거든 잠시 「북한 승도 절목」 앞에 서서 백삼십여 년 전에 있었던 북한산성 승려들의 외침에 귀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       

                                                             북한 승도 절목  

북한산성은 국가 안위의 중지(重地)이니 사찰을 창건하고 승도를 모집함이 어찌 쓸 모 없어 그러한 것이겠는가? 그것은 본디 산성을 수호하고자 한 뜻에서 비롯된 것이거늘, 근자에 승도는 흩어지고 사찰은 피폐해져 아침에 저녁의 일을 보장하지 못할 듯 하니 대체 어찌 된 까닭인가? 대개 승도들이 척박한 환경을 마다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것은 그들의 바라는 바가 오직 총섭(總攝) 한 자리에 있어서 그러한 것임에도, 매번 교체될 때마다 성 밖 승려들이 자리를 노리는 폐단이 빈번하게 있었다. 이로 인해 승도들이 굳건한 뜻이 없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니 이는 일의 형세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총섭의 교체시기를 맞이하여 만약 그 규정을 분명히 밝혀 영구히 이어지도록 하지 못한다면 어찌 승도들을 위무하여 수호의 책임을 다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군왕의 승인을 받은 규정[수교 정식]은 정중하게 받들어 시행하는 데 그 도리가 있으니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이에 절목(節目)을 만들어서 바위에 새기니, 이에 따라 시행하여 송사가 벌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나, 총섭의 자리가 비어 후임자를 세울 때는 이번의 예에 따라 처음에 투표함[缿筩]을 거두어들여 이름 옆에 동그라미 표시[圈點]를 한 후 동그라미표가 많은 이에게 후임 자리를 주어 공평무사한 뜻을 알게 하며      
하나, 금번 정식(定式)을 자세히 밝힌 후에 또다시 산성 밖의 승려로써 임명되기를 꾀하는 자가 있을 경우, 산성내의 여러 승려들이 수교 정식과 이번의 절목(節目)으로 다 같이 영문(營門)에 호소하여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하며      
하나, 이번의 정식은 실로 승도들을 보호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총섭은 이렇게 절실한 마음을 헤아려 사찰의 폐단을 혁파하고, 공사(公事)에 각고 면려하여 앞으로 실질적인 효과가 있도록 할 것.     

                                                        을묘년(1885) 5월 일. 사동(寺洞) 김 등.      

북한승도절목. 세월의 흔적으로 바위글씨는 마멸되어 판독이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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