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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당 이종헌 Nov 21. 2019

진도 한 달 여행하기2

금갑진성 지나 접도의 일상을 엿보다


금갑해수욕장의 아침 풍경. 바닷가에  고즈넉이  서있는 외딴집 한 채가 시선을 끈다. 비록 오막살이집은 아닐지라도...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 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갑자기 왜 이 노래가 생각나는지... 그러고 보니 어느덧 나도 늙은 아비가 되었구나. 오막살이집 뒷산에는 예전에 금갑진성(金甲鎭城)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았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금갑진성과 마주하고 있는 섬은 접도(接島), 본섬에 바짝 붙어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금갑도(金甲島), 갑도(甲島), 접섬, 접배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접도 연륙교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보이는 원다 마을, 마을 앞에 알록달록 색칠한 건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게 특이하다. 이 한적한 섬에 웬 포장마차? 가까이 가서 보니 바다에서 양식한 굴을 채취해다가 껍질을 깨고 알맹이를 분리해내는 작업장이다.


접도는 그 지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조선시대 죄인들의 유배지로 활용되었다. 안내 표지판을 보니 숙종~고종 연간에 이곳에 유배된 이가 대략 20명 정도다. 그중에 가장 먼저 정만조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정만조는 한말의 대학자인 강위(姜瑋)의 제자로 민비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이곳 접도와 사천리 등에서 12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은파유필(恩波濡筆)』 등의 저서를 남기기도 했으나, 오늘날 그는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친일 지식인으로, 그 이름이 친일반민족행위자(경학원 부제학. 대제학, 조선총독부 중추원 촉탁) 명단에 올라있다. 그는 소재 노수신과 함께 진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유배인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진도인의 자존심에 가장 큰 상처를 준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은파유필』은 1896년부터 1907년까지 진도 유배 기간의 생활을 일기체로 기록한 것으로 조선시대 진도의 민속과 풍속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접도 웰빙등산로와 국가지정 어항 수품항. 접도에 가서는 무조건 웰빙등산로에 올라야 한다. 누가 웰빙등산로에 오르지 않고 접도를 보았다 하는가? 수많은 자생식물과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경관, 탁 트인 시야.... 접도 웰빙등산로를 걷다 보면 일순간 막혔던 가슴 뻥 뚫린다. 가슴이 답답한 그대를 위해 접도 웰빙등산로를 적극 추천합니다.



접도 갯벌 체험 마을(황모리)에서 만난 주민들. 굴 껍데기 제거 작업이 한창이다. 문이 살짝 열린 작업장 안에 들어가서 사진도 한 컷 찍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한참 나누었다. 이쁘게 잘 찍어주씨요 잉~ 하며 수줍게 웃는 아주머니의 미소가 정겹다.



접도를 나오니 아직도 해가 많이 남았다. 내친김에 그 유명한 의신면 소재지 백구 마을까지 달려보자. 거룡 마을 근처 도로에서 로봇 태권브이와 신라 천년의 미소를 만났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그 은은한 미소 속으로 빠져들어가 본다. 누가 내 어깨를 툭 치며, 거, 인생 뭐 있쏘? 웃음시롱 사씨요! 하는 것 같다.


삼별초 궁녀둠벙. 삼별초가 왕으로 추대했던 승화후 온(溫)이 의신면 침계리 왕무덤재에서 붙잡혀 죽임을 당하자 삼별초의 궁녀와 부하들이 몽고군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자 이곳 궁녀둠벙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진도의 낙화암이다. 얼핏 보기에 수심이 무척 얕아 보이나 절굿대를 집어넣으면 그 끝이 금갑 앞바다에 닿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직접 절굿대를 넣어보지는 마세요.


한 번 주인이면 평생 주인 진돗개 백구

이 비의 주인공 백구는 천연기념물 제53호(세계 명견 334호)인 진돗개의 충성심과 귀소본능의 품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충견입니다. 1988년 진도군 의신면 돈지리 박복단 할머니의 집에서 태어나 다섯 살이 되던 1993년 3월 대전으로 팔려갔으나 할머니와 손자 손녀의 따사로운 정을 잊지 못하여 목에 매인 줄을 끊고 도망쳐 300여 km의 거리를 주인을 찾아 헤매다 1993년 10월 한밤중에 옛 주인인 할머니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백구는 할머니의 사라과 보살핌 속에 행복하게 지내다가 2000년 2월 열세 살의 나이로 주인의 품에서 차마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았습니다. 의신면 돈지마을에서는 충견(백구)의 품성을 높이 기려 자라나는 새싹들의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동네 사람들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웁니다. 

서기 2002년 11월 3일

돈지마을 들독의 유래

돈지마을 사람들의 후덕한 인심과 힘을 상징하는 이 들독은 100여 년 전부터 동네 사람들이 힘자랑을 해오던 토속 유물로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옛부터 들독들기 힘자랑 대회를 해오던 중 1983년 제1회 의신민속제부터 진도군 각 읍면마을 대표들이 모여 힘자랑 대회를 하면서 그 맥을 유지하여 왔다. 1995년 ~2007년 까지 서울에 있는 농협중앙회 박물관에 진열되어 오다가 2007년 10월 20일, 12년 만에 우리 마을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며 들독은 청색 하나인 청돌로서 가로 50cm, 세로 60cm, 무게 98kg(163근)에 달한다. 우리 마을의 상징인 돌아온 백구처럼 우리 곁으로 돌아온 이 들독은 우리 동네를 대외적으로 유명하게 한 또 하나의 명물로 자리잡았을 뿐만 아니라 명실공히 역사적으로도 보존 가치가 매우 높은 귀중한 토속 유물로 영원히 보호를 받아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옛날 동네 사람들의 체취와 향토색이 짙게 배인 들독에 대한 가치와 옛 향수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전래 풍습의 보존과 돌아온 들독의 위상을 한층 더 높이기 위해 제21회 돈지 논배미 축제 날에 즈음하여 이 표석을 세운다

2007. 11. 4. 돈지리민 일동

진도의 상징은 뭐니 뭐니 해도 진돗개. 진돗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충성과 의리이다, 멀리 대전까지 팔려간 진돗개가 300km 떨어진 집을 제 발로 찾아왔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다. 그 진돗개의 고장이라서 그런지 마을 이름도 의신면(義信面)이다. 아닌가? 너무 앞서나갔나 보다. 자세히 보니 義新面이다.

진돗개는 주인에게 충성심이 강하고 영특하지만 그러나 막상 가까이에서 대해보면 생각보다 덩치가 크고 사납다. 진돗개의 순종적 이미지만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늘 조심하자. 아, 그럼에도 진도에는 진짜 진돗개가 많다. 대부분 줄에 묶여 있으나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목줄 없이 돌아다니는 아이들도 있다. 차량을 이용하는 여행객들에게는 별 문제가 없지만 자전거나 도보로 이동하는 여행객들은 아무쪼록 조심 또 조심할지어다. 접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자전거를 타고 한참 내리막길을 달려 오르막길로 접어드는데 뒤에서 서너 마리의 개들이 미친 듯이 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온몸에 소름이 쫙~, 때마침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자동차가 없었다면 아마 난 지금쯤 병원에 누워있을지도 모르겠다. 여행객들의 안전한 여행을 위하여 행정당국의 적극적인 계도가 필요한 대목이다. 아무쪼록 진도에 가면 진돗개 주의하시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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