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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당 이종헌 Dec 01. 2019

진도 여행 4일, 여행자의 노래


아침 햇살이 너무 따사로워서 그랬는지 갑자기 빨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 한구석에 밀쳐두었던 빨랫감들을 꺼내 욕실에 있는 대야에 넣고 빨래를 시작했다. 세탁기만 있으면 사람의 손이 필요 없는 세상인데도, 요즘 아이들은 손빨래나 제대로 할 줄 알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비누칠한 옷들을 박박 힘차게 문질렀다. 옷감 속에 배어 있던 여행자의 땀방울이 하얀 거품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어렸을 때 고향집 무화과나무 옆에 작은 우물이 있었다. 나중에 수동식 펌프를 설치하기는 했지만 그 전까지는 두레박을 사용했었다. 어머니는 그 우물가에서 한겨울에도 손을 호호 불어가며 빨래를 하셨다. 하루가 멀다고 쏟아져 나오는 가족들의 빨래를 하며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마당에 쳐놓은 빨랫줄에다 빨래를 널자 누렇게 변한 잔디 위로 투명한 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문설주에 기대앉아 허공에 매달려 있는 빨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온갖 더러운 때를 말끔히 씻어낸 빨래는 어쩌면 가장 정제된 상태의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을 표백제 삼아 본래의 ‘나’를 되찾는 일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내 볼을 어루만지고,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와 내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이윽고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물기마저 빠져나가고 나면 내 몸은 새털처럼 가벼이 구만리장공의 먼 하늘을 훨훨 날아가리라.



오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여귀산 너머에 있는 아리랑 체험관에 다녀왔다. 경사가 심한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몇 차례나 오르내린 후에야 겨우 찾아간 곳이건만 번듯한 외관과는 달리 체험관 내부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관광객이 많은 휴가철이나 주말은 어떨지 몰라도 관광객의 발길이 뚝 끊긴 겨울 초입의 체험관은 열심히 바닥 청소를 하는 관리인 외에는 구경꾼도 안내인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체험실은 텅 비었고 전시실도 그저 구색 맞추기에 급급한 모양새였다. 그래도 어쩌랴? 어렵게 한 발걸음인 만큼 뭐라도 하나 건져가야겠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내용들을 열심히 기록하고 카메라에 담았다.



돌아오는 길에 죽림리 탑립 마을을 지나다가 문득 멋진 집 한 채를 발견했다. 마을과는 조금 동떨어진, 마을 위쪽 언덕에 자리 잡은 외딴 집인데 앞으로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고 뒤로는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 있으며 양쪽으로 좌청룡 우백호가 아늑하게 감싸고 있어서 풍수를 모르는 문외한이 보기에도 가히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기척이 있으면 들어가서 차라도 한 잔 얻어 마실까 하고 한참을 기다렸으나 끝내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을 이름이 탑립(塔立) 이어서 그런지 도로 주변에 돌탑들이 제법 많았다. 다리도 쉴 겸, 여귀산 돌탑 공원에 자전거를 세우고 돌탑의 유래를 적은 탑비와 함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시비(詩碑)들을 살펴보았다. 그중에 ‘나절로’라는 시가 있어서 즉석에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곳 진도군 임회면에서 ‘나절로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는 이상은 씨의 작품이었다. 작가의 이름도 그렇고 시풍 또한 어찌나 일제강점기 때의 시인 이상(李箱)을 빼닮았는지 하마터면 깜빡 속을뻔했다. 시인이 19살 때 쓴 작품이라고 해서 믿어지지가 않았는데 사연을 알고 보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시인은 20대 때 3년간의 도시 생활을 빼고는 60대 중반인 지금껏 고향에서 미술관을 운영하며, 시 속의 주인공처럼 살고 있다고 한다. 19살 때의 다짐을 평생 실천하며 살고 있는 시인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으나 방향을 돌려 ‘나절로 미술관’까지 가기에는 내 몸이 너무 지쳐있었다.      




내 방에는 시계가 없소

내 방에는 거울이 없소

내 방에는 달력이 없소

시계가 없어

초조함을 모루오

거울이 없어

늙어 가는 줄 모루오

달력이 없어

세월 가는 줄 모루오

아아

내사 절로 절로

살고 싶소


-이상은 시 <나절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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