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당의 북한산 이야기 18
선인들의 유산기를 통해 청담동을 알게 되었다. 물론 강남에 있는 그 청담동은 아니다. 북한산 자락 깊숙이 숨어 아직 세상에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금단의 땅, 국립공원 내에 있으면서도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어 일반인의 출입이 어려운 이곳에는 조선 헌종 연간에 독락재 구시경이 세운 청담 초당이 있었고, 또 그보다 약 40년 후인 숙종 때 수은 홍석보가 세운 와운루가 있었다. 남으로는 인수봉과 백운대가 우뚝 솟아있고, 북으로는 상장능선이 여인네의 치마폭처럼 골짜기를 감싸 안으며 서쪽으로는 노고산이 창릉천을 끼고 담장처럼 길게 둘러서있는 청담동은 천혜의 자연 풍광과 함께 북한산성의 배후로서 지리적인 중요성도 매우 높았다.
조선 숙종 38년(1712), 북한산성 축성이 끝난 직후 홍양 영장(洪陽營將) 윤제만(尹濟萬)은 그의 상소문에서, 대서문 밖에 남으로 삼백여 보의 성을 쌓아 남문을 삼고, 달이치(達伊峙)의 약간 낮은 곳에 백여 보의 성을 쌓아 북문으로 삼으면 주위 십여 리의 철옹성을 구축할 수 있다고 했다. 달이치는 오늘날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橋峴里)의 솔고개이다. 위로는 청담동이 있어 수량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땅이 넓고 지세가 평탄하여 북한산성의 취약점들을 보충할 수 있으니, 이곳을 외성으로 삼아 내외가 호응해야만 북한산성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었다. 윤제만의 상소는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인지 오늘날까지도 청담동 주변에는 많은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 청담동에 와운루와 청담 초당이 있었다. 조선 영조 때 기원 어유봉은 그의 「청담 동부기」에, 인수봉과 천령 아래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야트막한 동부가 있으며 그곳 물가 흰 바위 위에 와운루를 지었다고 적었다. 이때가 임오년(1702) 연간이니 이후 와운루는 약 150여 년간 삼연 김창흡을 필두로 남양 홍세태, 기원 어유봉, 윤경 정래교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시인묵객들이 유상곡수 하며 바람을 읊고 달을 희롱하던 도성 인근 최고의 명승으로 이름을 떨쳤다.
구시경의 청담 초당은 와운루 하류 200미터 지점에 있었으며 헌종 연간(1659)에 건립되어 약 40여 년 간 유지되었다. 독서와 사색을 위한 작은 초당이었으나 우암 송시열이 이곳을 방문하여 서산 정사라는 현판 글씨를 남긴 이후 일약 유명세를 탔으며 지금도 초당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인근 석벽에는 우암의 시가 새겨져 있다.
서산 정사와 와운루로 대표되던 이곳 청담동은 그러나 1850년을 전후해 와운루가 무너지면서 그 이름 또한 영영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남겨놓은 주옥같은 시와 문장, 글씨와 그림 등은 뿔뿔이 흩어져 간 곳을 모르고 그 천혜의 비경은 아직도 금단의 땅이 되어 돌아올 줄 모르고 있다.
세월이 흐른 지금 청담동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대신 이곳은 일제 때 지어진 육모정이라는 정자로 인해 육모정 터라는 낯선 이름으로 가끔씩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뿐이다. 미국의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뮤리엘 러카이저는, 우주는 원자가 아닌 스토리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육모정에 묻혀 영영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이름 청담동, 그 비밀의 동부에 감춰진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사진] 사기막골 입구의 민가. 한장석의 「유청담기」(1870)에, “이튿날 아침, 삼각산 발치를 따라 서쪽으로 향했다. 계곡을 좇아 십여 리를 가서 동구에 이르니 뭇 봉우리들이 엄숙하게 손을 모아 읍하는 듯하였다. 살구나무 백여 그루가 있는데 비단 노을처럼 붉은 꽃을 활짝 피웠고 초가집 서너 채는 맑고 깨끗하여 은자의 거처 같았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