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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해당 이종헌 Oct 09. 2017

인평대군과 조계동 구천 은폭

현해당의 북한산 이야기 1

구천 은폭 전경. 하단부에서 바라본 구천 은폭은 흡사 한 마리 용이 꿈틀거리는 듯하다.

11월의 쌀쌀한 날씨다. 가을은 언제 가버렸는지 단풍은 거의 다 지고 없고 마지막 잎새들만 노을 속에 붉다. 토요일 등산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북한산은 한껏 고즈넉하다. 겨울잠에 들어가기 전 부지런히 살을 찌워야 하는 다람쥐 무리들만 여기저기서 분주할 뿐, 마지막 잎새가 지고 나면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이제 곧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를 지나 대동문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등산로 초입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구천 은폭이 있다. 건기여서 물이 많지는 않으나 한껏 고요함 속인지라 떨어지는 물소리가 폐부를 파고든다. 송강 정철이 그의 관동별곡에서 금강산 십이폭포의 장관을 당나라 여산 폭포에 견주었듯이 조선 효종 때 인평대군 이요(李㴭)는 이곳 삼각산 조계동 폭포의 이름을  구천 은폭이라 명명하였다. 밤새도록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다가 그친 어느 여름날 아침,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구천 은폭 앞에 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나는 듯 곧장 삼천 척을 흘러내리니, 은하수 한 굽이 하늘에서 떨어지(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라고 한 이백의 시가 과연 이곳 구천 은폭을 두고 이르는 것이었음을 직감한다.  

    

지금은 지역주민들을 위한 배드민턴장이 설치되어 있는 옛 인평대군 별서 터에 올라 계곡 건너편을 바라보니 아홉 굽이 층계를 이룬 폭포가 위풍당당 버티고 서있다. 북한산 자체가 거대한 화강암을 지반으로 한 돌산이기에 양쪽 봉우리가 봉황의 날개처럼 우뚝 솟은 사이로 매끈한 화강암 피부를 자랑하며 서있는 구천 은폭은 흡사 미켈란젤로의 조각상들을 대하는 것처럼 군더더기가 없다.      


서기 1646년, 조선 16대 왕인 인조의 삼남 인평대군이 이곳 삼각산 조계동에 별서(別墅)를 마련하였다. 나라의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고 그나마 청나라와의 외교를 잘 이끌어나가던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시기심 또한 갈수록 깊어가는 때였다. 9년간의 인질생활에서 풀려나 귀국한 소현세자는 결국 두 달도 더 버티지 못한 채 싸늘한 주검으로 변하고 말았다. 민심은 흉흉해졌고 독살설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불에 기름을 붓듯 인조는 세손을 제쳐두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연경에 있다가 급거 귀국하여 일련의 참상을 목도한 인평대군은 이듬해 삼월, 삼각산 조계동에 별서(別墅)를 짓고 우렁찬 폭포 소리에 몸을 맡긴 채 스스로 세상으로 향한 문을 닫았다.  

    

세상만사가 다 허공을 걷는 일처럼 부질없음을 알았던 것일까? 25살 젊은 인평대군은 폭포의 중허리를 가로질러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보허각(步虛閣)을 세웠다. 돌다리 한쪽에는 영휴당(永休堂)을 세웠으니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암투 현장을 떠나 오직 물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산속에서 마음 편히 살자고 함이었을까? 문득 당년의 보허각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폭포 중허리 양쪽을 연결하여 아치형 돌다리를 세우고 그 위에 정자를 올렸는데 뒤로는 나는 듯한 물줄기가 하늘에서 쏟아지고 앞으로는 광활한 마들 평[노원 평야]이 눈앞에 펼쳐지니 그야말로 별유천지 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의 선경 아닌 선경이었다.       

구천은폭 바위글씨. 왼쪽 하단에 작은 글씨로 ‘이신(李申) 서(書)’라는 각자가 보인다.

그 밖에도 폭포 상단 암벽에 구천 은폭이라는 글씨를 새기고, 또 폭포 주변에는 송계 별업(松溪別業), 창벽(蒼壁), 한담(寒潭) 등의 글씨를 새겼다고 하나 지금은 구천 은폭 네 글자만 완연한 옛 모습을 자랑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찾아볼 수 없다. 구천 은폭 바위글씨는 한 글자 당 가로세로 70㎝ 크기로 전체 3미터 규모이다. 해서체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썼으며 오른쪽 하단에 이신(李伸)이라고 써서 글씨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다. 이신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인평대군의 1659년 연행기(燕行記)인 연도 기행(燕途紀行)에, “당하관 전 현감 이신이 예방을 맡았다.”라고 한 기록이 있고, 또 유본예의 한경지략(漢京識略)에 “흥화문은 경희궁의 정문으로 이신이 썼다.”라는 기록이 있어 이신이 인평대군과 상당한 친분이 있었고 당대에 제법 이름 있는 명필이었음을 짐작해 보는 정도이다. 물론 두 책에 나오는 인물이 동일인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인평대군은 조계동에 별업을 지음으로써 현실정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하였지만 조정에서는 그런 그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시서화에 능한 조선의 문인이었고 탁월한 외교 전문가였다. 그런 까닭에 이후로도 여덟 차례나 더 사행길에 올라야 했으니 38세의 나이를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무려 11차례나 연행사의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약소국의 사신으로 겪어야 했을 수모와 무력감, 또 거의 일 년에 한 번 꼴로 이루어졌던 사행길의 고단함은 그의 죽음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38년의 세월, 짧지만 결코 짧지 않았을 인평대군의 삶을 돌이켜 보며 흐르는 물에 잔을 씻어 술 한 잔을 부어 올린다. 인평대군은 그의 송계집(松溪集)에서, 천백 년 지나 화려한 단청 건물은 무너지고 없을지라도 돌다리와 폭포만은 영원하리라고 하였건만 오늘날 돌다리마저 사라진 채 폭포만 무심히 흘러내리고 있다. 우암 송시열, 미수 허목, 삼연 김창흡 등 후대의 내로라하는 문객들이 이곳 조계동을 찾아 인평대군의 옛 자취를 더듬으며 그 허망한 삶을 조상하였다. 창랑 홍세태의 시 한 수를 읊조리며 술 한 잔을 기울이고 나니 멀리 마들평 위로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 않는다.     


조계 보허각 [曹溪步虛閣]     


왕자가 하늘 길 떠난 지 오래니 [王子天遊遠]

텅 빈 산에 쓸쓸함만 가득하네 [空山漫寂寥]

차가운 물소리 빈 누각을 울리고 [寒流響虛閣]

누렇게 시든 가을 풀 무지개다리를 덮었네 [秋草沒虹橋]

암자는 무너져 거처하는 스님 없고 [庵毁無居衲]

해질 무렵 숲에는 나무꾼도 보이지 않네 [林昏不見樵]

담쟁이넝쿨 사이로 저녁달이 떠오르는데 [傷心綠蘿月]

다시 누가 있어 퉁소 소리 울려 퍼지리 [誰復夜吹簫]

 

19세기 동국여도에 표기된 조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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