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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곰 Aug 20. 2024

뜻밖의 사랑

카파도키아는 대중교통이랄 게 없다. 버스도, 지하철도 보기 어렵다. 그래서 관광객들은 교통수단을 빌리거나 이동이 포함된 투어 상품을 이용한다. 오토바이를 빌릴까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한국에서도 오토바이를 탄 적 없는데 초행길을 운전하다 무슨 일이 생기려고. 렌트는 깨끗이 포기했다.


여행 후기를 몇 개 정독한 다음 투어 사이트를 뒤적였다. 이 지역에서 보편적인 여행 상품은 크게 세 가지인데 본래 방문 목적이었던 벌룬 투어가 거센 바람에 날아가 버렸으므로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가지였다. 첫 번째는 여행자 숙소가 몰려있는 괴레메 근방의 관광지둘러보고 오후 3시쯤 도착하는 레드투어, 두 번째는 멀리 이동해 지하도시와 계곡, 절벽 수도원 등을 둘러보고 저녁 식사 전 돌아오는 그린투어. 가고 싶은 곳이 절묘하게 나뉘어 있어 고민이 됐다.


나는 가성비를 따지는 인간이다.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같은 값에 멀리까지 갈 수 있는 그린투어 쪽을 택했을 것이다. 궁금했던 지하 도시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좋았다. 세상천지 어디에서 지하 도시를 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두 가지가 나를 자꾸 멈칫하게 했다. 하나는 며칠 내내 나를 괴롭히고 있던 배탈이고, 다른 하나는 여행 초반 이스탄불에서 했던 한인투어의 기억이다. 아침 8시부터 시작된 도보투어는 효율적인 여행을 선호하는 한국인들 취향에 맞게 하루 안에 이스탄불의 명소를 모두 관광하는 코스로 꾸려졌다. 정말 알찼지만 정말 고됐다. 나는 선생님 눈에 들기 위해 앞자리에 앉는 모범생처럼 맨 앞에서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열심히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투어가 끝나자마자 쑤셔 넣었던 지식들이 모두 휘발되어 버렸다. 벼락치기한 다음 시험을 보고 나면 모든 게 지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여행을 너무 전투처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는 낙오됐고, 몸 상태는 부실하니 졸병 중의 졸병이다. 일단 레드투어를 하는 게 맞다. 투어를 하고 돌아와 숙소에서 좀 쉰 다음 저녁에는 마을을 구경하여유롭게 보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수염이 덥수룩한 가이드 Jan(이하 잰)을 만났다. 봉고차 조수석에서 내린 잰은 막 방랑을 마치고 돌아온 휴잭맨 같다. 멀대 같이 큰 키에 곱슬곱슬한 머리가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풍겼다. 마이크도 가방도 없이 운동화에 추리닝 차림이어서 산책하러 나온 동네 주민 같기도 했다. 차 안에는 엄마와 딸로 보이는 두 사람이 타고 있었고, 내 뒤로 4인 가족이 탑승했다. 봉고는 어색한 공기와 일곱 명의 여행객을 싣고 출발했다.


잰은 움직이는 봉고 안에서 유창한 영어로 자기소개를 했다. 그다음 커다란 지도를 펼치며 여행할 곳들을 간단히 브리핑했다. 지역에 대한 간략한 소개, 여행 코스와 소요 시간, 점심식사와 투어 종료시간을 군더더기 없이 안내하고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질문을 처리하는 솜씨까지 명강사가 따로 없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설명을 마치고 옆 자리 빈 좌석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여행객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나는 눈으로 창밖을 쫓으면서 들려오는 대화를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세웠다. 선생님과 이야기하려고 차례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긴장되면서도 왠지 설렜다. 내 앞에 앉은 모녀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왔고, 그 앞의 네 사람은 부모와 자녀들로 브라질에서 가족여행을 왔다고 했다. 모두 튀르키예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잰이 나에게 물었다.  


"곰곰, 너는 어디서 왔어?"

"한국."

"오~ 한국! 잘됐다! 저기 브라질 가족 딸이 케이팝 팬이래~"


그는 데면데면한 친구 무리를 건너 다니며 아이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선생님처럼 대화를 이끌었다. 어느새 첫  번째 목적지에 다 와 있었다. 잰은 우리를 모아놓고 한바탕 설명을 한 뒤 사진 찍기 좋은 장소를 안내해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삼삼오오 길을 따라 내려가고 나는 잠시 멈춰 풍경을 담았다. 잰이 다가와 물었다.


"어때? 마음에 드니?"

"응. 멋지네. 한국에는 이런 데가 없어."

"다행이다.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제일 멋진 곳을 먼저 보여주려고 했거든."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꽤 뿌듯해 보였다. 잰은 혼자 있는 내 사진도 찍어주고, 스페인 모녀와 브라질 가족들의 가족사진도 찍어주었다. 그가 물꼬를 터줘서 그런지 다른 여행객들과 어울리는 게 어렵지 않았다.


다음 장소는 괴레메 국립공원 안에 있는 야외 박물관이었는데 입장하는 곳부터 얼룩덜룩한 개 한 마리가 우리를 따라왔다. 잰은 익숙하게 개를 쓰다듬으며 가이드를 했다. 그는 그 지역 강아지들과도 친했다. 어디에 어떤 개가 살고 있는지까지 알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걸으며 동굴 유적지를 구경했다. 바람과 사람의 힘으로 둥글둥글하게 다듬어진 바위들. 돌만 봐도 재밌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자, 퀴즈를 하나 낼게. 여기는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잰이 나무 문이 달린 석조 건물 앞에 멈춰 서더니 말했다.

"창고?" "교회?" "모스크?"

"정답은 이따가 알려줄게." 잰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리도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저걸 보면 내 마음이 정말 따뜻해져. 사랑이 있다는 걸 믿게 되거든." 잰이 벽 한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과거 무슬림의 박해를 피해 깊은 골짜기까지 숨어 들어온 기독교인들은 돌 벽에 십자가를 새겼다. 무슬림은 마을을 침략했고, 교회는 모스크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무슬림들이 물러가고 주민들이 돌아왔을 때 십자가가 그대로 남겨져 있던 것이다. 벽을 부수거나 십자가를 덮어 칠하는 대신 누군가 십자가 가운데 작은 홈을 파서 불을 밝혔다. 파괴하지 않고 남겨둔 덕분에 십자가는 약간 그을렸을지언정 망가지지는 않았다. 다른 동굴 교회의 프레스코화 또한 그런 식으로 살아남았다. 교회이자 모스크.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존했던 곳.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멋지다. 이야기하는 잰의 목소리에서 이곳에 대한 사랑이 묻어났다. 투어를 마치고 나서도, 카파도키아를 떠나온 뒤에도 그 목소리는 오래 기억에 남았다.


무엇을 사랑할 수 있을까. 무엇을 사랑하면 좋을까. 무엇이라도 좋으니 진심을 다해 애정을 쏟고 싶어졌다.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정성을 다해 사랑하다 보면 세상의 많은 것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다. 무언가를 깊게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랑을 해칠 수 없으니 그런 마음이 모이고 모여 더 커지지 않을까. 오래전 십자가를 살려두었던 사람에게서 전해진 뜻밖의 사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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