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둠활동 금지, 친교놀이 금지로 극도의 심심함에 다다른 아이들은 궁여지책으로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 댔다. 낙서도, 딱지도 질려갈 무렵 주헌이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고안한다. 수학 시간에 쓰고 남은 학종이를 잘라 랜덤 뽑기 통을 만든 것이다.
룰은 간단하다.
1. 먼저 묻고 싶은 질문을 던진다. "오늘 저녁에 제가 치킨을 먹을 수 있을까요?"
2. 간절한 마음으로 뽑기 통에서 쪽지를 뽑는다. - 아마도..
3. 제작자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돌아간다.
그리고 자투리 종이를 모아 허접하게 시작된 야매(?)점성술은 어느새 세력을 키우며 착실히 고객들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묻는 사람이나 답하는 사람이나 모두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질문을 갖고 답을 찾는 아이는 나름 그럴 싸한 답에 만족해 돌아갔고, 만족한 고객의 입소문을 타고 '정답의 책'이 흥행에 박차를 가했다. 더 많은 친구들이 찾아오자 제작자들은 더욱 신이 나 새로운 정답의 책들을 생산해댔다. 아이들은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 질문하며 국운을 점치기도 하고, 하루 운세나 미래의 애정전선 같은 것을 가늠해 보기도 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하늘이 구름에 덮여 교실이 어둑어둑하던 어느 날,
정답의 책이 나에게도 왔다.
주헌이가 "선생님도 해 보세요!" 하며 뽑기 통을 들고 온 것이다.
나는 기대감에 찬 아이들의 기세에 부흥해 간절하게 질문을 던졌다.
우리 반 아이들이 방학 전까지 제 말을 잘 들어줄까요?
결과는 암담했다.
- 불가능!
삽시간에 교실은 웃음바다, 나는 울상이 됐다.
"안 돼, 안 돼. 이거 인정할 수가 없어. 신뢰도가 떨어졌어!"
주헌이가 깔깔대며 말했다.
"그냥 받아들이세요, 선생님!"
그때 구세주처럼 윤서가 정답의 책을 내밀었다.
"선생님, 저 이거 있어요. 이걸로 해 보세요"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이들의 눈이 온통 쏠렸다. 그리고 나는 책을 펼쳤다.
- 더 많이 사랑하라
책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더 많이 사랑해야 하는구나.
어쩐지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 후로 아이들은 내가 잔소리를 할라치면 역시 불가능한 게 맞았네, 선생님이 우리를 더 사랑해야 하네 마네 하면서 훈수를 두었지만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교사는 기약 없는 짝사랑을 하는 사람이라고.
모든 아이를 넘치도록 사랑해주는 게 힘에 부쳐도, 그래도 더 사랑해야 한다고.
놀랍게도 아이들은 "선생님이 너희를 더 사랑할게" 약속한 이후로 방학식 전까지 정말 말을 잘 들어주었다. 정답의 책이 마법이라도 부렸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