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년생 고의남

이상한 나라의 돌봄일대기 [00]

by 곰곰

우리 할머니는 1938년생. 이름은 고의남이다. 육 남매 중 셋은 일찍 죽고, 현재는 할머니와 언니, 남동생만 남아 있다. 근방에서 나고 자라 광주광역시에 살고 있다.

할머니와 남매들. 맨 왼쪽이 할머니

의남은 의로운 남자(義男)라는 뜻인데, 다분히 가부장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이름이라는 것 외에 눈을 씻고 봐도 할머니 인생에 의로운 남자를 찾기 힘들다는 점에서 상당히 유감스럽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할머니가 열두 살 때, 아버지는 열아홉 살 때 돌아가셨고 그래서 할머니는 찢어지게 가난하고 아주 어렵게 살아야 했다.

할머니의 남편, 즉 나의 친할아버지라는 남자는 (일찍 돌아가신 것으로 포장되었으나) 사실은 오래전에 처자식을 버리고 혼자 떠났다고 한다.

오래된 앨범 속에서 찾은 할머니의 결혼사진

할머니의 두 아들도 의롭다고 보기는 힘들다. 첫째인 우리 아빠는 성질머리를 못 이기고 학교를 중퇴하고 할머니 속을 썩이다가 전기 일을 배워 지금은 머나먼 타국을 전전하며 건설현장에 있고, 둘째인 작은 아빠는 사업을 하다 쓰러져 할머니 가슴에 못을 박고 세상을 떠나 버렸다. 이런 연유로 할머니 인생은 서럽고 외롭고 지겹게 힘들었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혼자 식모살이에 삯바느질을 해가며 두 아들을 키웠고, 아들들이 낳은 네 명의 손자, 손녀들을 보았으며 큰아들이 지독하게 싸운 끝에 며느리와 갈라서고 난 후에는 둘이나 되는 손자를 도맡아 키웠다.




나는 그녀의 손녀다. 직역하면 할머니의 친손자 네 명 중 첫째다. 의역하면 고단한 인생에서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붙잡은 동아줄이자 본인 손으로 꼬은 새끼줄이며, 할머니피셜 뙤약볕에서 고생해가며 대학까지 보냈는데 어렸을 때는 할머니를 지독히도 위하더니 이제와서는 저 혼자 컸다는 듯이 수시로 배은망덕을 일삼는 애증과 집착의 대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나한테 이러는 거 알면 사람들이 다 욕한다, 키워봤자 아무 소용없다고 해도 널 믿었는데, 동생은 안 그러는데 너는 왜 그러냐, 어렸을 때는 안 이랬는데 지금은 왜 이러냐 등등의 레퍼토리로 무장한 할머니와 싸우기도 수백 번. 고집스런 맹신과 반복되는 하소연에 회유, 설득, 무시, 짜증으로 반격하며 언성을 높이기는 수천번.

젊은 할머니와 어린 나

그러나 할머니는 이제 나 말고 다른 것과 싸우고 있다. 흐려지는 기억력과 노쇠한 몸, 약한 치아도 할머니 편이 아니다. 치매는 할머니를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렸다. 할머니의 빈틈을 무서운 속도로 파고드는 시간. 이것은 할머니가 상대하는 무시무시한 시간에 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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