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

이상한 나라의 돌봄일대기[01]

by 곰곰

할머니의 증상이 시작된 게 최근의 일은 아니다.

스웨터의 올이 풀리는 것처럼 변화는 서서히 진행됐다. 내가 할머니의 상태를 적당히 모른척하거나 알고도 무시하거나 노인네 엄살 정도로 치부하는 동안.


1. 잊기와 잃기

지갑이나 버스카드, 도장 따위를 깜빡하는 건망증이 처음이었다. 다음에는 통장의 비밀번호를 잊었다가 아예 통장을 어디 두었는지를 까먹어서 수차례 재발급을 받았다. 전자레인지에 돌린 음식을 잊었고, 용변 보고 화장실 물을 내리는 것을 잊었고, 먹으려고 꺼내놓은 반찬이나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냄비를 잊었다. 방 안에 두고 문을 닫고서는 강아지를 찾으러 한참이나 밖을 헤매고 다녔다. 혹시나 불이 날까 봐 자동소화 기능이 있는 가스레인지를 사고, 멀티쿠커를 들였지만 탄 냄비를 줄이지는 못했다. 냄비에서 그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잊기는 곧 잃기가 되었다. 할머니는 소지품을 잃어버리거나 소지품을 넣어둔 가방을 잃어버리거나 둘 다 잃어버리기를 반복했다. 심경에 변화가 있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에는 수십 년 다니던 동네를 헤매다가 길을 잃거나 무작정 발길 닿는 곳으로 가서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다며 전화를 해오기도 했다.

나는 할머니가 스스로를 잃어가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2. 집착

초반에 나는 할머니의 병이 손자 집착증이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할머니는 나를 비롯해 동생들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말을 자주 했는데, 우리 남매가 한 집에 살다가 대학에 진학하며 독립을 하다 보니 증상이 더 심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 언제 오냐고 묻거나 아픈 목소리로 아무것도 못하겠다고 하소연을 하며 얼른 오라고 했다. 물건을 잃어버렸다, 김치를 담가야 한다, 세탁기가 고장이 났다, TV 소리가 잘 안 들린다... 이유도 가지각색이었다.

일요일 저녁 본가를 떠날라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짐을 챙기고는 따라와서 자고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쪽의 사정을 아무리 설명해도 할머니는 철옹성이었다. '너는 내가 키운 내 손녀. 니 집도 내 집인데 왜 오지 말라는 거냐'는 리였다.

집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그녀는 손자들이 있는 곳에 무작정 방문했고, 무조건 반겨주기를 원했다. 점차 반가움보다는 난감이 앞섰. 개인적인 일정이나 사적인 공간의 필요성을 설득하다가 참지 못하고 화를 냈고, 싸움이 잦아졌다. 마음이 상한 할머니는 온종일 하소연을 그치지 않았다.

한평생 그녀의 자존심의 근원은 우리였고, 그래서 우리는 집착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CYMERA_20200803_143527.jpg 할머니와 네 손자들

3. 감정이라는 구덩이

네 명의 손자 중 할머니 제일 많이 돌보는 사람은, 그래서 할머니와 제일 많이 싸우는 사람은 나다.

할머니가 있는 곳에서 고속버스로 한 시간 삽 심분 거리에 사는 나는 평일 동안 부지런히 문의전화를 받는다. 불안과 죄책감을 유발하는 통화 후 본가에 가면 할머니가 한껏 일을 벌여놓은 상태로 기다리고 있었다. 냉장고에서 썩어가는 식재료와 기름기와 고춧가루가 남아있는 그릇, 걸을 때마다 쩍쩍 붙는 바닥, 강아지 오줌으로 냄새나는 이불...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엉겨 붙어 금요일까지의 노동으로 지친 나를 괴롭게 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하나하나 선생질을 하다가 다시는 이 집에 발도 안 들일 거라고 마무리로 못을 박았다. 내 만행의 대가는 쉬지 않고 몇 시간에 걸쳐 이어지는 할머니의 인생 수난사와 한풀이를 듣는 것이었다. 감정의 늪에 빠진 할머니는 자기 연민을 휘두르는 무법자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렇게 대하냐, 너도 나이 먹어봐라 다른 망구들은 더 심하다, 내가 이러려고 뼈 빠지게 너희를 키운 줄 아느냐"로 시작하는 레퍼토리는 과거 억울했던 것과 현재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 탓으로 이어지며 앞으로는 이러지 말라고 마무리된다. 혹자는 장녀가 힙합을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할머니들이야말로 힙합의 신세계를 열어줄 거라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은 K-장녀와 할매의 디스전이 난무하는 힙합의 산실이었다.


4. 자만의 세계

안예은의 홍연이라는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산산이 부서지는 눈부신 우리의 날들이 다시는 오지 못할 어둠으로 가네.


귀가 심각할 정도로 어두워지면서 할머니의 많은 부분도 혼자만의 세계에 남게 됐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안 들리니 대화가 안 됐고, 자신감이 없어지고 사회성도 떨어졌다. 일상생활에도 제약이 늘었다.

네 명의 손자들은 할머니가 거짓말을 하는지 진짜로 그렇게 믿고 있는지 점차 헷갈리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긴 대화 중 들리는 몇 마디 말을 주워서 꼬깃꼬깃 접어놨다가 원하는 대로 콜라주해 기억을 재구성했다. 단골 미용실 아줌마는 나에게 몇 가지 증언을 덧붙였는데, 한 번은 할머니가 파마를 하러 왔다가 다른 미용실에 다녀왔다며 이웃이 가자고 해서 자신은 어쩔 수 없이 따라갔다고 변명을 하더란다. 아줌마는 괜찮다고, 여기저기 다닐 수 있는 거라며 넉살 좋게 할머니를 안심시켰다. 그런데 머리를 말고 기다리는 동안 할머니가 갑자기 말을 바꿨다. 미용사 아주머니에게 '내가 여기밖에 안 다니는데 왜 다른데 다녀왔냐고 면박을 주냐, 나는 절대 다른 미용실에 간 일이 없다'고 항변한 것이다. 아주머니는 그 후로 나를 볼 때마다 꼭 할머니 모시고 치매 검사 좀 받아보라며 치료를 권유했다.

다년간의 진실공방을 통해 나는 할머니에게 그런 사실이 없다거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됐다.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 보고 듣는다. 기억을 편집해 재구성하면서 할머니는 고립됐다. 누워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볼 때마다 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몰라 무서웠다.




때로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붙잡지 못하는 모래 같은 것들이 있다. 사람이 늙고, 스러지고, 사라지는 순간들이 그러하고, 시답지도 않은 이유로 가까워졌다 멀어지는 관계들이 그러하고, 다시 올 거라고 기약하지 못하는 기회와 추억들이 그러하다. 시간은 흐르고, 천천히 공평하게 순간이 빠져나간다. 어쩌면 사람은 그런 순간들로 이뤄진 존재인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몸도, 마음도 약한 어린아이가 되었다.

할머니가 모아두었던 시간은 모래시계처럼 뒤집혀 거꾸로 흐르고 있다. 할머니가 잃어버린 순간들은 차곡차곡 모여 돌아왔다. 그녀는 치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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