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황소고집은 그녀를 추동하는 힘의 원천이다. 할머니는 이따금씩 우리집의 풍경을 바꿔놓는 태풍을 몰고 오는데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미운 82살의 고집이다.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녀가 쓸고 지나간 자리를 수습하는 것은 온전히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나는 비바람을 몰아쳐대는 태풍의 눈으로 향하며 평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 한 번 태풍이 지나고 나면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진부한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나도 운전할 수 있어
아빠의 역마살은 어쩌면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일까. 할머니는 가만히 있으면 병이 나는 것 같다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점차 복잡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할머니는 자가용을 원했다. 처음에는 손자들 보고 차를 사라며 돈을 보태겠다고 하더니 여의치 않자 운전을 배우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나이 먹은 사람들은 있는 면허증도 반납하라고 권장하는 판인데,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나는 할머니의 말을 적당히 일갈하고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런데 할머니는 몰래 운전면허학원에 가서 등록을 했다. 다행히 팔십 넘은 노인이 면허를 따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아 이 에피소드는 할머니의 운전학원 구경으로 끝났다. 나중에 할머니의 일탈을 전해 들은 나는 침을 삼켰을 뿐이다.
강아지를 데려와
다음에 할머니의 관심을 끈 것은 강아지였다.
한 집에 살던 손주 둘이 모두 훌훌 저마다의 자리를 찾아 나서자 할머니는 무료함을 견딜 수 없었는지 다른 키울만한(?) 것들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때 길을 지나다니는 강아지들이 할머니 눈에 들어왔고 주야장천 강아지를 데려오자는 염불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할머니 혼자 실행에 옮겨서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2017년 당시 막 발령을 받아 전주에 있는 학교에 근무하고 있었고, 동생은 군대에 있었고, 아빠는 오토바이 사고로 수술을 받고 본가에서 회복 중이었다. 가족 중 누구도 강아지를 원하지 않았다.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강경한 거부 의사를 표했다.
할머니는 잊힐만하면 강아지 타령을 했지만 나는 결국 뒤치다꺼리가 내 차지가 될 걸 일찌감치 예감했다. 강아지를 좋아했기에 준비도 안된 채로 무작정 데려오는 건 더욱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반면 우리집의 부자(父子)는 애초에 강아지와 데면데면한 비애견인들이었다. 멀리 갈 것 없이 냄새와 용변만으로도 그들은 고개를 저었다. 한마디로 우리는 다른 생명을 감당할 준비가 안 돼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거실에 곯아떨어져있던 무더운 여름날, 할머니는 동생을 데리고 가 털이 부슬부슬한 작은 생명체를 사 왔다. 아빠는 사색이 됐고 나는 소리를 질렀지만 동생은 "할머니가 이미 돈을 냈다는데 어떡해"하며 투덜댔다. 갈색 푸들은 눈치 없이 신나게 내 손을 깨물었다.
우리 집의 막내가 된 푸들 고커피
우리는 간과했지만 할머니는 결심한 건 이뤄내는 위인이었다. 반려건 커피와의 아찔한 동거는 다행히 행복하게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도 그 날을 생각하면 눈 앞이 아득해진다.
다른 할매들은 다 이거 쓴단 말여
할머니는 전화통화를 좋아한다.지금보다 상태가 나쁘지 않을 때는 하루에 대여섯 번씩, 받을 때까지 전화를 걸어댔다. 어느 날 할머니는 내 스마트폰을 보며 "그거는 얼마나 하냐?"고 슬쩍 물었다. "느네는 맨날 그거만 들여다보더라." 하면서.
폴더폰도 더듬더듬 사용하는 마당에 할머니가 스마트폰을 가진다는 건 내 입장에서는 어불성설이었다. 더욱이 멀쩡한 핸드폰을 어딘가에 두고, 잃어버렸으니 새로 사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고, 혼자 대리점으로 달려가 핸드폰을 질러댔던 할머니의 화려한 전력 때문에 가족 모두는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 수습하지 못한 약정 위로 쌓이는 위약금과 대리점 판매자들과의 신경전, 왜 그랬냐 물어도 기억이 안 난다며 마트 놈들이 자신을 속여 어쩔 수 없었다는 할머니의 변명까지...
그래서 우리는 할머니의 스마트폰 욕구를 더욱 경계했고, 조금 더 기다렸다가 나중에 같이 사자고 여러 번 회유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결국 평화조약을 깨 버렸다.
손자들이 알면 분명히 한 소리 얻어들을 것이 뻔하니 아래층 이웃할머니를 대동해 스마트폰을 장만하러 간 것이다. 다른 할머니들은 잘만 쓰던데, 나도 죽기 전 그놈 하나 가져보는 게 소원이라고 졸라대니 어쩔 수 없었다며 이웃할머니는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머리가 깨질 듯했다. 긴 수난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할머니는 요즘 스마트폰을 배우고 있다. 터치부터 애를 먹지만 예쁜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그래도 최선을 다해 가르쳐 볼 생각이다.
날 집에 보내줘
할머니가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그곳에서 다시 집으로 퇴원하기까지의 매일은 정말 고되었다.
중환자실에 있던 일주일 간 할머니는 약에 취해 잠들 때나 누워있을 때가 아니라면 온 힘을 긁어내 집에 보내달라며 소리쳤다.
"내가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 나 멀쩡한데 왜 이런 데다가 나를 놔둬!"
같은 병실 환자와 그들의 보호자들은 갈 때마다 따가운 눈총을 쏘아댔다. 밤새도록 사람을 볶아대니 시끄러워서 못 자겠다고, 병실을 옮기라고 항의했다. 하도 고함을 쳐대니 새벽에 처치실로 격리를 당할 정도였다. 하루 11만 원을 주고 불렀던 간병인도 도저히 못 하겠다며 그만둬버렸다.
할머니는 손자들이 병원에 있을 때에는 주무시는 사이에 병원에 남겨놓고 갈까 봐 잠들기도 무서워할 정도였다. 기력 없이 노쇠한 몸으로 신발을 신으려고 했고, 소지품과 옷가지를 찾아 가방을 싸 놓았고, 여러 차례 콧줄을 빼 버렸다. 계단에서 떨어서 다쳤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고, 계속해서 내가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르겠다며 집에 다면 다 낫는다고 몸을 일으키려다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간병인을 새로 불러야 하나, 요양병원에 모셔야 하나.. 매일 성화를 해대는 환자를 두고 뾰족한 수 없이 한숨이 나왔다. 머릿속에서는 간병인에게 욕을 해대는 할머니, 요양병원 침대에 묶여 소리를 질러대는 할머니가 마구잡이로 재생됐다. 집은 오래된 맨션, 4층인 데다 엘리베이터도 없다. 할머니가 의지할 손잡이도 없고, 상주하는 의료진도 없다.
그러나 다시 병원으로 가는 건 할머니의 고집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고, 할머니가 원하는 마지막도 병원 침대에 힘없이 널브러진 모습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는 사정을 듣더니 자가퇴원동의서를 쓰고 가라고 했다. 결국 우리는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쓴 후, 할머니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집으로 온 첫날, 할머니는 물정 모르고 걸음마를 막 뗀 아이 같았다. 부축을 받으며 4층 계단을 힘주어 올랐고, 떠먹여 주는 죽 반 그릇을 비우고 아기처럼 색색 잠이 들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 유난히 울어댔던 나는 훌쩍 커 버리고, 그때의 할머니는 이제 손길이 필요한 어린애가 되어버렸다. 받은 만큼 갚아야 하는 게 은혜라면, 아, 이 황소고집은 또 얼마만큼 감내하며 갚아나가야 할까.
모르는 사이에 할머니는 나를 돌봐주던 사람에서 내가 돌봐줘야 할 사람이 되었고,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될 것이다. 얼마나 고집 센 늙은이가 될지, 할머니를 거울 삼아 오지 않은 날을 가늠해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