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녀라는 말, 진짜 웃기지 않냐

이상한 나라의 돌봄일대기[03]

by 곰곰

긴 병에 장사 없다고들 한다. 의학기술의 발달과 길어진 평균 수명은 현대의 효녀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이제 아픈 노모를 위해 손가락을 자르거나 약을 구하러 설산을 헤매는 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졌다. 중요한 것은 충분한 인내심과 경제력이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200803162850_1_crop.jpeg 공교롭게도 나는 효자동에 산다 (출처: 우리고장 전주)

인터넷을 켜고 지도를 보면 주변에는 수많은 요양병원과 주간보호센터가 있다.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조금만 동네를 돌아다녀도 요양시설을 수북하게 찾아낼 수 있다.

전통적으로 가족 공동체 안에서 이뤄지던 약자 돌봄이 서비스로 전환되어 경제활동의 영역에 포함된지 오래다. 그래도 사람들은 위급한 순간, 사랑과 정성으로 병자와 노인을 돌보는 효녀를 찾는다. (며느리 버전의 효부도 있다.) 누구나 효녀 한 명쯤, 마음에 품고 있잖아요.

동네에서 찍은 노인보호시설 간판들

얼마 전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다가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나는 효녀라는 말 들으면 이상하게 웃기더라."


대관절, 효녀는 뭘까? 주위 사람들로부터 효녀라는 말깨나 듣는 나는, 문득 이 낱말의 본질을 의심해본다.




내가 생각할 때,

효녀는 가족을 돌보다가 돌아버리기 직전인 사람 또는 돌아버린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돌봄은 쳇바퀴 같다. 매일매일 바퀴를 돌리는데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효과는 미미하고 현상유지나 하면 다행이다. 살림의 본질과 소름 끼치게 비슷하다. 매일 먼지처럼 쌓이는 고된 노동이지만 어려움을 제대로 인정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효녀가 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 말벗하기며 환자의 이야기 들어주기
* 우울하거나 화난 상태의 환자 진정시키기
* 투약이나 병원 진료 관리 (외의 각종 병수발)
* 공과금 내기, 통장 관리 등 각종 금융 업무
* 필요한 생필품 사기
* 장보고 식재료 장만하기
* 식사 및 반찬 마련
* 주방 정리와 음식물 처리
* 양치, 세수, 머리 감기기, 목욕, 용변 처리 등의 위생관리
* 빨래와 이불, 옷가지 정리
* 청소, 고장난 물건 수리
* 정리정돈과 쓰레기 버리기
* 나들이나 가벼운 산책, 운동 등의 바깥 활동에 동행하기
* 필요한 서비스 알아보고 요청하기 (지자체나 관련기관 지원 프로그램, 요양 서비스 등)
* 의사소통, 정보 공유 (가족, 친지와 환자상태를 알리거나 일정 조율)


여기에 사람들이 효녀에게 기대하는 일 목록이 따라붙는다.

* 위의 모든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기
* 돈이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기
* 고통이나 어려움을 드러내지 않기
* 시설이나 기관에 떠넘기지 않고 직접 하기
* 노인이나 병자뿐만 아니라 어린 자녀나 반려동물을 전부, 동시에, 한꺼번에 돌보기

효자는 어디갔냐고? 걔는 돈 버느라 바빠서, 남자라 이런 일은 못해서, 원래 애가 그런 애라 빠져있다.

사람들은 맡겨둔 걸 찾는 것마냥 당연하게 효도를 찾는다. 걱정을 앞세워 오지랖을 휘두른다. 어른들의 효녀 신화가 어찌나 견고한지 나는 매번 놀라면서도 늘 새롭게 질려버린다.


"할머니가 아프신데 너라도 옆에서 돌봐야지."

"키워준 은혜가 있는데. 당연히 갚아야지, 그럼"

"옆에 와서 같이 살아야지. 언제까지 남한테 맡길래."

"손녀가 대단하네. 근데 할머니, 딸은 없으셔?"

"너희 아빠 보고 엄마랑 다시 합치라고 해라. 며느리라도 있어야지."

"**(남동생)은 원래 그런 거 못 하잖아. 누나가 되어서 너는 꼭 똑같이 시켜먹어야겠냐?"


타지에 살면서 평일에는 일을 하고, 금요일 저녁에는 할머니가 계신 광주에 내려가 주말을 고스란히 헌납했다. 볼 때마다 가족들, 일가친척들, 이웃 사람들은 나를 더 대단한 효녀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만성질환처럼 쌓였다. 나는 내가 맡은 모든 역할이 답답하고 억울했지만 이런 사정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 고립감을 느꼈다. 기약없는 자기희생은 모든 게 아픈 할머니 때문이라는 분노로 번졌다가 다음 순간에는 그녀에 대한 연민과 죄책감으로 변했다.


모두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듯하다. 세상이 효녀들에게 반복하는 일종의 세뇌다.


"너는 효녀야. 효녀여야만 해."



#성평등전주_밀어주기 #재난시대지속가능한성평등활동지원사업 #밀어주기 #성평등전주 #전주시사회혁신센터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