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하지 않으면 위탁하는 삶을 산다. 현재 당신이 보는 건 당신의 미래다
지금 피어있는 꽃, 눈앞의 현실은 이전에 스스로가 뿌렸던 씨앗에서 나온 것이다.
원인이 없는 곳에 결과는 없다.
- 이노우에 히로유키
선택하지 않는 사람에게
삶을 책임지고 살아가지 않는 사람에게
선택하고 있지 않다고 착각하는 사람에게
부자가 되고 싶지만, 되기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에게
잠시도 가만있지 못한다. 카카오톡의 # 인기웹 Fun을 보거나 친구들의 프로필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본다. 틈만 나면 인스타그램 유튜브 웹툰을 보거나 게임을 한다. 스마트폰에 얼굴을 처박았다. 우리는 왜 관심과 시선을 밖으로 돌리고 마음과 정신을 위탁하려 드는 것일까.
무언가에 중독되고 싶다. 내면에 휘몰아치는 혼돈과 걱정을 위탁하고 싶다. 친구를 부르고 술을 찾고 잔을 부딪치며 감정을 떠넘긴다. 다음날 아침 찾아오는 공허함. 우리는 왜 홀로 온전히 서지 못하고 무언가를 찾는 걸까. 왜 자신이 처한 문제에 대해 본인과 진지하게 독대하지 않는 것일까.
감정과 삶과 미래를 누군가가 책임져주길 원하는 걸까. "제발 내 영혼을 가져가요"라며 저승사자를 부르고 있다. 왜 우리는 삶의 주체성이 이 정도로 떨어지는 걸까. 마땅히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와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려는 걸까.
인터넷에서 언젠가 이런 사진을 본 적이 있다. 2층 피트니스 센터로 들어가는 입구 중앙에 계단이 있고 양 옆으로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사진 속 사람들은 계단이 아닌 에스컬레이터를 통해 센터로 들어가고 있었다. 위키트리는 이 사진을 '가장 아이러니한 사진' 중 하나로 소개했다.
웃자고 올린 사진에 심각해졌다. 나는 저렇게 살고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다음날 아침 지하철에서 충격적인 실태를 목도한다. 평소 운동량이 적다고 생각한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했다. 아무런 의심 없이 앞사람을 따라 에스컬레이터 우측에 한 줄로 섰다. 멍하니 서있는 자신을 마주했다. 나는 왜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고 있는 걸까.
어제 본 사진이 생각났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계단을 바라봤다. 계단을 오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람들은 일렬로 줄지어 개미떼처럼 올라갔다. 의문이 들었다. 이중에는 운동이 필요한 사람이 없을까? 아니 운동하겠다고 다짐한 사람이 없나? 혹시 지금 피트니스 센터로 이동하는 사람은 없을까?
취업한 뒤로 매주 하던 농구도 그만둔 지 오래다. 체력이 너무 약해졌고 운동의 필요성을 느꼈다. 계단을 오르며 여전히 에스컬레이터에 한 줄로 서있는 사람들을 보면 의아한 기분이 든다. 분명 나보다 운동이 필요한 사람이 많아 보인다. 퇴근하며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사람들 중에는 분명 필라테스나 커브스, 피트니스 센터, 혹은 유산소 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니 출퇴근하는데 운동을 해야 해? 그때 하지 않더라도 저녁에 하면 되잖아?'라고 반문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 그런데 요점은 그게 아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자문했다.
내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기로 선택했었나?
우리는 선택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필자에게는 대학생 2학년인 여동생이 있다. 가끔 만나면 이렇게 묻는다. "자퇴할 건지, 휴학할 건지, 졸업할 건지 선택했어?" 꼰대 잔소리 같은 질문에 동생은 "일단은 다닐래"라고 답했다. "그럼 졸업하면 뭐할 거야? 이번 학기엔 어느 정도 성적을 받을 건지 결정했어?" 집요하게 말꼬리를 문다. 언제나 선택과 책임을 강요해서 미안한 마음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선택하고 살아야지.
사실 나도 알고 있다. 동생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나의 결핍 때문이란 걸. 동생이 고등학생일 때도 계속 물었다. 대학에 진학할 것인지, 바로 일자리를 구할 것인지. 대학을 간다면 어느 전공을 선택하고 싶은지. 그 전공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고, 졸업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명절날 어르신이 꿈이 뭐냐고 묻는 것처럼 동생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물어야 했고 묻고 싶었다. 내 동생이, 선생님이 공부하라니까 공부하고 친구들이 대학 가니까 대학 가길 원치 않았다. 결과가 어찌 됐든 본인이 선택하길 원했다. 그리고 그 선택에 책임지길 바랐다.
선택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은
삶을 산다
고3, 부모님 선생님 친구들 모두 공부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사회적 분위기에 억눌려 공부해야 할 것만 같다. 학교에서 늦은 시각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시킨다. 공부를 하지 않던 친구가 점심시간에도 공부한다. 일단 공부를 해보는데 도무지 왜 하는지 모르겠다. 대학 가면 살도 빠지고 잘생기고 이쁜 선배들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참고 공부한다. 목적은 없지만 긴장되는 수능을 치르고 성적표를 받는다. 우리 아빠 직업밖에 모르는 선생과 30분 면담한 후 대학을 선택한다. (이 과정에서 괴상한 보상심리가 형성된다.)
내 점수에 맞는 대학에 들어왔다. 새로운 환경이 어색하다. 처음 만난 친구들과 함께 수강신청을 한다. 전공은 내가 생각하던 공부가 아니었다. 본인이 배우고 싶은 과목과 교수를 선택하기보다 '적당한' 수업을 고른다. 과제가 많지 않고 발표가 없고 점수를 잘 주는 수업. 대학생활을 신나게 즐기다가(권장한다) 4학년이 되어서야 미래(?)에 대한 걱정을 시작한다. 동기들이 뭘 하는지 주위를 둘러본다. 어떤 스펙을 쌓는지 물어본다. 친구들이 무엇을 하는지 예민하게 반응한다.
친구들이 준비하는 자격증 중 적당한 것을 따라 한다. 이것도 하지 않으면 뭔가 불안하다. 겉으로 무언가 열심히 하는 척을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안심된다. 부모님과 친구한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할 수도 있다. 근데 어디서 겪은 일 같다. 맞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이렇게 했다. 그때 가고 싶은 대학과 원하는 전공이 없었던 것처럼 지금은 다니고 싶은 기업과 일하고 싶은 직종이 없다. 난 무엇을 해야 할까. 모르겠다.
4학년이 끝나간다. 초중고 12년, 대학 4년 동안 학교에서 하란 것만 했다. 이제 날 지켜주는 곳, 내가 소속한 곳이 사라진다. 불안하다. 어디라도 지원해본다. 지금까지 적당히 배워왔던 전공과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곳에 지원한다. 원하는 회사도 없으니 이력서와 자소설을 수십 개 써야 한다. 운이 좋게 1차 서류를 통과한 몇 곳에서 면접을 본다. 운이 좋으면 붙고 운이 나쁘면 떨어진다.
운이 좋아서 붙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 난생처음 아버지뻘 사람들과 한 사무실에서 일한다. 꼰대들도 있지만 그래도 사수는 착하다. 다행이다. 처음 접하는 환경과 업무에 긴장된다. 어리바리하면서 실수한다. 실수를 통해 배우며 성장하는 느낌이 든다. 업무를 하나씩 익혀나간다. 이제 직장에서 조금은 쓸만한 일꾼이 된 것 같다.
이제 욕먹지 않고 일한다. 후배도 들어온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도 받는다. 그래 내가 책임감과 성실함은 있다.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근데 뭔가 허전하다. 일이 손에 익었는데 이걸 평생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상사를 본다. 가정을 꾸리고 퇴근만 하면 집에 들어가는 가정적인 착한 내 상사. 저분은 이 회사에서 10년 넘게 일하셨다. 내가 계속 여기 있으면 저분처럼 되겠지? 내 미래를 보는 것 같아 뭔가 찜찜하다. 내가 저렇게 살아야 하나?
일하다 보니 결혼 적령기가 다가온다. 혼기를 놓쳐 평생 ‘나는 비혼주의자’라고 거짓말할 자신이 없다. 적당한 사람을 만나 결혼한다. 아이가 태어난다. 더 이상 회사를 그만둘 수 없다. 매월 나가는 카드값, 주택과 자동차 할부, 아이 분유값을 생각하면 멈출 수 없다. 이 나이에 나가면 어디서 날 받아줄까. 경력단절이 겁난다. 절대 그만둘 수 없다.
우울한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자. 선택하지 않는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극단적으로 기술했다. 물론 모두가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일을 하며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어느 대기업의 신입사원 50% 이상이 2년 안에 퇴사한다고 들었다. 내가 받아온 한국사회의 교육을 생각해보면, 저 상상 속 이야기의 주인공이 정말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선택하지 않는다고 기구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삶은 정해진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도 선택하지 않고 남들이 가는 대로 따라 살다 보면, 삶이 저렇게 흘러갈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선택하지 않는 걸까?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따르면 사람은 보통 하루에 150번의 선택을 한다. 1년이면 5만 4750번이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선택을 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위의 '선택하지 않는 삶'의 이야기 속 주인공은 자신의 진로와 커리어를 왜 선택하지 않은 것일까. 그 선택이 매우 어렵고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일까. 그 선택은 자신이 책임지기에 너무 무거운 결정이기 때문일까?
처음 불편한 문제를 제기했던 에스컬레이터 사례를 보면 무거운 결정만 회피하는 것 같진 않다. 적어도 나의 경우엔 그랬다.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할지, 계단을 오를지 정도의 사소한 것도 선택한 적이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솔직하기란 어렵다.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차원의 솔직함은 오히려 쉽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기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미국 예능 중 'The Moment of Truth' 직역하자면 '진실의 순간'이라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참가자는 거짓말탐지기를 사용하며 21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질문에 답할수록 상금을 계속 올라가지만 거짓을 말하면 상금이 모두 사라진다. 예상할 수 있듯이 난처한 질문들이 많이 나온다. 가족이 보는 앞에서 '미혼인 척하려고 결혼반지를 뺀 적이 있느냐'라고 묻는다. 심지어 전 남자 친구가 나와서 '나와 결혼했어야 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는다.
한 참가자는 모든 질문에 솔직한 답변을 하다가 20만 달러(약 2억 원)를 앞에 두고 실패한다. 그 마지막 질문은 'Do you think you're a good person?'이다. '본인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참가자는 "Yes"라고 답했지만 거짓말탐지기는 거짓이라고 판정했다. 참가자는 상금 앞에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만 실패했다.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했다. 질문이 ‘당신의 부모나 친구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였다면 훨씬 쉬웠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있어도, 자신에게 진실하기란 어렵다. 어렵다는 것은 자신의 뜻대로 쉽게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중요한 시험 앞에서 긴장한 경험을 떠올려보자. 이 시험이 인생에 중요하지 않다고 되뇌어도 심장 박동은 줄어들지 않는다. 면접을 볼 때 면접관이 1시간 후에 모르는 아저씨라고 생각해도 긴장은 풀리지 않는다. 좋아하는 이성 앞에서 떨리거나 중요한 업무 앞에서 긴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에 집중하거나, 닥친 일을 하나씩 처리해나가면 되지만 긴장은 계속된다.
우리의 무의식적 지각 구조를 속일 수 없다. 절대 불가능하다. 생각과 인식을 바꾸기란 간단하지 않다. 단순한 사실과 지식을 습득한다고 해서 인식이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이 변할 때가 있다. 간단한 사고의 전환이 일어났을 뿐인데, 근심과 걱정이 모두 사라진다. 체한 속이 다 풀리는 기분이다.
자신에게 솔직하고 진실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러니 이제 받아들일 준비가 됐길 바란다. 진실을 말하겠다.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한다
토론토대 심리학과 조던 피터슨 교수는 저서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행동과 선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늘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이 들어간다. 만약 지금 당신이 하는 행동이 다른 대안에 비해 더 좋다고 판단하지 않았다면 지금 그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치 판단이 배제된 선택은 없다. 가치 판단은 모든 선택, 모든 행동의 전제 조건이다. 일단 어떤 행위를 선택하면 그에 대한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내면에서 자동으로 작동한다.
조던 피터슨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선택에 앞서 가치를 판단한다. 어떤 사소한 행동을 하더라도 우리는 사실 판단했다. 이를 받아들이고 선택에 대한 내 인식을 바꾸는 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난 정말 에스컬레이터를 타기로 선택하지 않았다고 믿었고 그렇게 말했다. 나는 진심이었지만 팩트는 아니었다. 의견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모두 선택한다. 모든 행동은 무의식적 가치 체계에서 판단하고 선택된 것이다. 그 가치 체계는 살아오면서 쌓아 올린 것이다. 무의식이 무서운 이유다. 겉으로 드러난 사소한 행위가 '에스컬레이터와 계단 사이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이외에도 많은 것을 선택해왔지만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하루에 150번 선택한다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당신은 운동하지
않기로 선택했나?
에스컬레이터까지는 괜찮다. 조금 수위를 높여보자. 당신은 현재 몸매에 만족하는가? 우리는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오늘도 스마트폰에서 몸매가 좋은, 섹시한, 근육질의, 날씬한 사람들의 사진도 봤다. 우리는 멋진 몸을 갖고 싶다. 이를 갖기 위해선 운동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오늘 점심엔 칼로리가 높은 정크푸드를 과식했고 저녁엔 운동하지 않았다. 이왕 오늘 버렸는데 야식으로 치킨과 맥주도 먹을까?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한다는 헛소리를 지껄인다. 사실 이것도 모두 내 선택이었다. 현재 몸무게와 체지방률은 내가 선택한 결과다.
먹는 것까지는 괜찮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가지고 치사하게 그러지 말자. 그런데 더 중요한 게 있다. 당신은 퇴근 후 자기 계발을 하지 않기로 선택했나? 우리는 어릴 적 꿈이 있었다. 되고 싶은 사람이 있었고,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을 보며 언젠가 저렇게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선택하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보다 나은 사람이 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인가?
다시 삶을 반추해본다. 언제부터 이렇게 저열하고 발전 없는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인가? 모든 행동에 가치 판단이 들어갔다면, 내 가치 체계는 왜 이렇게 생겨먹은 것일까? 도대체 왜 이런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지독하게 잔인한 진실은, 내가 그렇게 선택했기 때문이다.
의학박사이자 경영학 박사인 이노우에 히로유키는 저서 '배움을 돈으로 바꾸는 기술'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으로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소개한다.
현실은 항상 자기 자신의 생각이 실현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그 사람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그 사람의 생각이 현실화된 것이 그의 인생이다.
우주의 법칙 중 하나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다. 원인을 만드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인생은 명백히 그 사람 자신의 것이다. 지금 피어있는 꽃, 눈앞의 현실은 이전에 스스로가 뿌렸던 씨앗에서 나온 것이다. 원인이 없는 곳에 결과는 없다. 이토록 명백한 사실은 없다. 뿌리지 않은 씨앗이 현실로 나타날 수 없다.
뿌리지 않은 씨앗이
현실로 나타날 수 없다
이노우에 히로유키는 현재 삶이 자신의 생각이 현실화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진실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합리화하는 사람이다. 합리화는 무섭다. 합리화하는 사실을 합리화하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 그는 괴물이다. 일이 잘 풀리면 자신이 잘했기 때문이고, 결과가 좋지 않으면 남이 잘못했기 때문이다. 난 그런 사람이 무서워서 피해 다닌다.
우리는 모두 주변에 합리화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합리화를 시도하는 말을 할 때마다, 불편하지만 애써 지적하지 않은 적도 많다. 진실을 말하면 그가 분노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처럼 합리화를 많이 하진 않지만, 우리도 무의식적으로 합리화할 때가, 자신을 속일 때가 있지 않을까.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정신질환을 숨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알다시피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정신질환을 갖고 산다. 이 말에 따르면 우리는 합리화하는 모습이 눈에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내면에선 계속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합리화하는 그 사람과 우리는 별반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했다. 이를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이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30분 뒤에 남 탓 환경 탓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합리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를 제기하면 이렇게 말한다. "아니, 이건 진짜 그 새끼가 잘못한 거잖아!" 미안하다. 당신 인생에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그런 사람을 믿고 일을 맡긴 당신의 잘못이다. 야박한 게 아니다. 진실이 그렇다. 그래도 인정할 수 없다면 제3인칭 시점으로 보자.
사랑하는 자녀가 친구에게 배신당해 투덜거린다. 당신은 자녀에게 "그 친구가 잘못했네, 잊어버려"라고 말할 것인가, "앞으로 그런 친구를 믿으면 안 돼. 다음부터는 친구를 잘 보고 믿자"라고 교훈을 줄 것인가. 전자로 대답한다면 자녀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이 겪는 것처럼 생각하면 조금은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다. 냉정하게 객관성을 되찾아라.
조던 피터슨의 조언처럼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살피려면 먼저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 자신을 책임지고 도와줘야 할 사람처럼 대하라. 사소한 선택을 내리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묻듯이 본인에게도 물어라. 원하는 게 무엇인지, 이것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물어보자. 이것보다 나은 선택이 있는지, 이 선택의 결과를 어떻게 예상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지 사려 깊게 물어보며 자신을 배려하자.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하면서도 선택하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남들이 사는 대로 산다. 그들이 가는 대로 에스컬레이터에 따라가 뒤에 줄을 선다. 친구들이 하는 대로 적당히 공부한다. 그들이 가는 대로 대학을 가고, 남들이 취업하는 대로 취업한다.
모든 선택엔 가치 판단이 들어간다. 다른 사람을 쫓아 사는 이유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로 내 가치 체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러러보는 브랜드의 옷을 사 입고, 그들이 좋아하는 성격으로 나를 변화시키고, 그들 눈에 멋진 집에 살고, 그들이 멋있어하는 차를 타고, 그들이 아는 유명한 회사에 입사한다. 당신은 선택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겠지만,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선택이었다.
자신이 선택한다는 사실을 잊은 채, 다른 사람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은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것 정도는 괜찮다. 정말 위험한 것은 경제적인 부분이다.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따라가는 것은 위험하다. 남들이 많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다른 사람들이 많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가면 안전한 느낌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길로 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경제적인 분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꼭 안전하지는 않을 수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부자는 소수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다수이기 때문이다. 로버트 기요사키는 저서 <부자 아빠의 자녀교육법>에서 다음과 같은 통계치를 제시한다.
미국 정부 연구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65살 이상 노인 100명 가운데 1명은 부자이고, 4명은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으며, 5명은 아직도 일을 하고, 56명은 정부나 가족의 지원이 필요하며 나머지는 이미 고인이라고 한다.
우리는 정부나 가족의 지원이 필요한 56명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1%의 부자까지는 아닐지라도 빚이 없고 노후에 안락한 삶을 살길 원한다. 그런데 통계 수치는 확실하게 말해준다. 다수가 가는 길로 가면 가난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심지어 로버트 기요사키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1>에서 재산 모으기가 힘든 이유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재산 모으기의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는 자신에게 솔직하고, 대중과 함께 가지 않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대개 대중이 가장 늦게 나타나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경제적으로 안전하지 않을까? 엠제이 드마코는 <부의 추월차선 완결판 언스크립티드>에서 그 이유를 대중의 유래에서 찾는다.
대중은 경제적 목적(도축, 털 깎기, 젖 짜기)을 위해 조직화됐다. 떼거리와 함께 무리 지어 다니다 보면 떼거리를 위해 계획된 예측 가능한 결과만을 얻게 될 것이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명확히 모르겠지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문제로 고생한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부자들이 소수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경제적으로 대중들이 가는 길로 따라가는 게 정답은 아닌 것 같다. 이 글은 경제적으로 부유해지기 위해 대중과 다른 길로 가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단지 행동의 가치 판단에 따른 주체적인 선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이 왜 가난한지 그 이유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조던 피터슨은 모든 선택에 우리의 가치 판단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이노우에 히로유키는 현재 삶이 본인의 생각이 현실화된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이를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라고 설명한다. 로버트 기요사키는 "돈은 사람의 생각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돈은 아이디어일 뿐"이라며,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는 그들이 가난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세 사람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원인은 '생각'이다. 우리는 멋지고 건강한 몸을 원하면서도 매일 운동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란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를 합리화하기 쉽고, 남 탓 환경 탓할 것이 아니라 본인의 선택이었단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도 말했다. 이를 경제적으로 적용시켜 보면, 납득하기 힘든 결과가 나온다.
현재 가난함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사실은 선택한 것이었다. 뚱뚱한 몸매와 과체중, 비만을 원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그런데 운동하지 않고 에너지 소비보다 많은 열량을 섭취하는 사람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결과를 원하지 않았다지만 사실 그들이 선택한 것이다. 이와 같이 가난함을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가난해지기로 선택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가난한 사고방식으로 자신을 계속해서 가난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떠한 의사결정을 내리더라도 언제나 가치 판단을 한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다. 소비에도 마찬가지다. 구입을 통해 얻는 만족보다 가격이 크면, 우리는 구입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커피 한 잔의 가격이 5000원인데, 그것을 통해 얻는 만족감이 5000원보다 적다면 커피에 돈을 쓰지 않는다. 우리가 카드를 주고 돈을 건네면서 무언가를 구입할 때는, 이 가격에 상응하거나 그 이상의 만족이 있을 때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돈을 낭비한다. 집에 들고 오면 가치가 떨어질 물건들을 구매한다. 미래에 가치가 떨어질 것을 자신의 미래와 인생을 담보 잡아 구입한다. 소득의 110% 만큼 소비하며 늘 돈이 부족하다. 그들은 이 거래를 선택한 것이다. 이 돈보다 가격보다, 만족이 높기 때문에 카드를 긁고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다. 건강한 몸을 갖고 싶지만 운동하지 않듯이, 부자가 되고 싶지만 돈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낀다. 보다 섬세하고 사려 깊은 태도가 요구된다. 모든 선택의 이면에 숨어있는 가치 체계의 전복이 필요하다. 다른 결과를 위해선 다른 인풋을 넣거나 인풋의 처리과정을 바꿔야만 한다. 같은 행동과 사고를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가치 체계의 전복을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사람을 뜯어고치기 위해 니체가 필요할 수 있지만 우리는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주 작은 부분, '생각'이다.
현재 자신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다면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현재 본인의 삶은 과거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오늘은 어제 우리가 생각한 결과다. 다른 내일을 원한다면 오늘은 어제와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 나는 지금 지극히 당연한 상식적인 말을 하고 있다. 절대 소수만 아는 비밀 같은 것이 아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에너지의 부족, 활력의 부족, 무기력함, 만성 피로를 겪는다. 이럴 때 우리는 크게 2가지의 선택을 할 수 있다. 첫째, 주변 사람들에게 피곤하고 힘들다며 어제 몇 시간 잤는지 말하기. 둘째, 스마트폰 그만 보고 일찍 잠자리에 들며 에너지를 아끼고 유산소 운동하기.
행동을 바꾸기 위해선 다른 선택을 내려야 한다. 선택을 바꾸기 위해선 가치 체계가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해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가 운동하는 비결은 운동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매일 자신이 운동하는 생각을 하면 곧 운동하게 된다. 이를 위해 결단이 필요하다. 이 글을 읽고 오늘 저녁부터 한동안 그만뒀던 운동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내일부터 시작하겠다고 하며 잊는 사람도 있다.
부자들은 어떤 선택을 내렸길래 부를 얻은 것일까. 같은 아이템으로 창업하는데 어떤 사장님은 성공하고, 어떤 사장님은 빚더미에 앉는다. 그 차이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실력은 미세한 것을 구분하는 차이다. 요리사는 내가 똑같이 느끼는 두 음식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안다. 디자이너는 어떤 부분의 색상을 조정해야 할지 알고, 사업가는 사업의 수익성을 파악한다. 일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그들은 본다. 우리는 그들의 관점을 '통찰'이라 부른다.
제대로 보려면 뜻을 정해야 한다. 내가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하겠다고 뜻을 정하는 순간부터 거리의 간판과 모든 활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자동차에 관심을 가지면 차만 보고 다닌다. 신발이나 가방을 사기 위해 검색해볼 때도 마찬가지다.
뜻을 정하면 집중해서 볼 수 있다. 무엇을 바라볼지 무엇을 쫓을지 선택해야 한다. 시선을 돌리면 몸이 따라간다. 스키나 스노보드를 탈 때도 마찬가지다. 시선이 머무는 방향으로 몸이 자연스레 따라간다. 탁월한 성과를 내려면 집중해야 한다. 시선은 돋보기가 되어서 당신의 아이디어와 에너지를 한 곳으로 집중시킨다. 충분한 열을 받아 임계점을 넘어서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 혹은 모든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보인다. 그것이 비전 Vision이다.
난 여러분이 원하는 소득을 올리며 그로 인해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돈이 많아졌다고 방탕하게 살고 부채를 늘려 보다 넓은 집과 비싼 차를 사는 삶이 아니다. 돈이 많아져서 자유로운 시간이 늘어나고 하고 싶은 취미도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더 보냈으면 좋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당신의 소득이 늘어나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란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돈이 많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이 몇 년 후에 재산을 다 잃어버리거나 몇십억 원의 연봉을 받던 운동선수들이 파산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나는 당신이 돈이 적더라도 행복한 삶을 살길 바란다. 적은 것에 만족하며 유유자적 안빈낙도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다. 돈이 적더라도 부자가 되는 과정을 즐기며 부를 쌓아 나가길 바란다.
추상적인 이야기지만 이 모든 것은 생각에서 시작한다. 단 하나의 생각은 인식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생각이 있다면 그 생각을 꽉 붙들길 바란다. 놓치지 말고 글로 적고 출력해서 써 붙이고 소리 내어 읽길 바란다. 간절히 원하면 그것이 현실이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사소한 선택을 결정짓는 무의식적 가치체계를 이성적으로 주체적으로 변화시키라는 뜻이다.
이 글을 읽으며 당신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글을 읽으며 가치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 글을 클릭하기 전 읽기로 판단을 했다. 글을 읽으면서도 도중에 그만 읽을지 끝까지 읽을지 판단을 여러 번 했다. 그리고 이 글을 읽은 후에도 판단을 한다. 이대로 삶을 살 것인지, 이 글의 내용을 받아들여 생각을 변화시킬 것인지 선택한다.
사실 글을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변화에 대한 의지가 있는 분이거나 어느 정도 글의 내용에 동감하시는 분이라 생각한다. 내가 무너지지 않길 바라는 사람들, 내가 바라는 것을 성취하길 진심으로 기대하는 사람들, 몇 년 후 나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 내가 성공하리라 믿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많을수록 성공하는 인생이 아닐까. 이러한 의미에서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좋아한다. 감사하다. 나도 당신이 원하는 바를 꼭 이루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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