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소설] 잃어버린 것 1
진짜 찾아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나는 지금 기억이 오락가락한다. 원인은 교통사고 때문이다.
사고 당시 기억이 도려낸 것처럼 소실되었고 전후 사정도 대부분 흐릿하다. 다만 사고가 일어난 강렬한 순간만은 생생하다. 자동차 경적소리와 고무 타는 냄새에 이어 몸이 붕 떠 날아간 찰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진공 상태가 된 채 시야가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바뀌더니 세상이 뒤집혀 있었다. 몇 분인지 아니면 몇 초였는지 시간이 흐르고 이마를 흠뻑 적시는 무언가를 닦아내려 했는데 팔을 들 수가 없어서 몹시 당황스러웠고 갑자기 불이 꺼지듯 눈앞이 깜깜해졌다.
다음 순간 눈 떠보니 병원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며칠 동안이나 의식이 없었다고 한다. 긴급 수술 등으로 상처 난 몸을 회복하고 의식을 찾기까지 이미 많은 시간을 건너 띈 상태였다.
현재 확실하게 아는 건 어떤 남자가 몸을 던져 나를 구하려 했으나 불행히도 본인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나는 심각한 머리 부상으로 뇌가 고장 났다는 것이다. 이것도 나중에서야 전해 들어 알게 되었지만.
죽을 뻔한 큰 사고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죽지 않고 살았으니 다행이랄까. 최소한 내 목숨줄을 끝까지 포기 안 하고 애써준 의료진들 덕분에 저승길에서 되돌아온 셈이다.
도로 위에서 다치고 죽어간 수많은 야생동물이나 인간처럼 어쩌면 늘 있어왔던 불행한 사고들 중에 하나, 그 피해자 중 하나일 뿐.
내게 일어난 사고임에도 남 일처럼 담담한 것은 원래 내 성격일까 기억에 문제가 생겨서일까.
교통사고로 찢기고 멍든 몸은 다 나았는데 뇌수술의 후유증인지 사고 충격 때문인지 과거의 기억이 흐릿하다. 정확히는 부분 부분 기억들이 돌아오고 있으나 대부분의 기억에 큰 구멍이 났다. 단편적인 장면들은 사진처럼 또는 짧은 움짤처럼 예고도 없이 떠오르다 사라지기 일쑤다. 기억 자체가 매끄럽지 않고 두서가 없다. 누더기를 이어 붙인 듯 뒤죽박죽이다.
그래서였다. 두통과 어지러움을 일으킬 뿐인, 생각나지 않는 과거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췄다. 물론 생각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 더 생각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마치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도리어 머릿속을 온통 코끼리가 차지해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깨어난 이후 내내 안갯속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번개 치는 밤하늘처럼 번쩍거리며 단편적인 기억들이 떠오르다 사라지길 반복하였고 지쳐버렸다. 더는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과거 없는 사람이 없겠지만 현재 난 사고 후유증으로 기억나지 않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됐다.
아쉬운 건 한 가지다. 외로움.
어찌 된 일인지 매일 아침 울면서 잠에서 깬다. 무언가, 아주 소중한 걸 놓치고 있는 것처럼. 아니면 기억나지 않는 엄청 서러운 일을 당했던 건지. 하루도 빠짐없이 눈물과 울음이 멈추지 않는 아침을 맞이하는 게 정상인가? 뇌가 정말 심각하게 고장이 난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더 답답하다.
가지고 있는 소지품에 신분증이 있어서 다행히 신원은 증명이 되었으나 예상대로 가족이 없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찾아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럴 거라 예상했었다.
고아였다. 나는. 다행히 번듯한 직업과 직장도 있었다. 자동차 정비공이었던 나는 사장과 직원 한 명뿐인 정비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아참! 그렇다. 나를 구하려다 죽은 그 남자가 바로 내가 일하던 정비소 사장이었다. 특이한 건 현재 내 주민등록 주소지가 그의 집이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그와 나의 관계가 단순히 직장동료-사장과 직원 사이-보다는 깊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를 구하려 트럭 앞에 몸을 던졌겠지. 직원 이상으로 나를 아꼈던 건지 아니면 그저 선한 마음으로 나섰다가 운 나쁘게 죽고만 건지 모르겠다. 나로서는 고맙지만 원치 않는 부채감과 닮은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고 왜 그랬는지 의아할 뿐이다.
어쨌든 그 남자-기억에 구멍이 나서 그 사람에 대한 기억도 낯설다 못해 삭제된 건 마냥 아무것도 없다 보니 평소에 사장이라고 불렀을지 아님 편하게 형이라고 불렀을지 호칭조차 떠오르지 않기에 여전히 나한테는 인칭 대명사일 뿐인 사장-에 대한 의문점은 한 가득이었으나 도통 기억이 돌아오지 않아 난감하다.
애초에 몸이 나을 때까지는 그 남자의 존재 자체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다 사고조사 때문에 방문한 경찰과 대화하면서 그 남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의 존재와 나를 구한 행동의 인과관계에 대해 알고 싶어 기억을 뒤져봤다.
수술 후유증인지, 마치 누군가 일부러 삭제한 것처럼 그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다. 전부 사라져 있었다. 분명 같은 직장에서 일했고 사장이기까지 한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의심스럽기만 했다.
도대체 왜? 사고 직전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몹시 궁금하지만 당장 떠오르는 기억이나 정보가 없으니 답답해도 의문을 풀 길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몸에 난 상처가 아무는 동안 의사의 말 대로 차츰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기억에 이상이 생겼을 뿐 기본적인 말과 행동, 상식 같은 기초지식들은 큰 문제가 없어서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겠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퇴원하게 되었다.
다행인 건 사고를 낸 트럭 운전사가 든 보험이랑 소속된 회사 보상금 등 여러 곳의 지원으로 치료비와 얼마간 보상금을 받았다는 거다.
당장 생활엔 지장이 없겠지만 그래 봐야 두어 달 정도 버틸 정도라서 하루빨리 일을 구해야 한다. 구멍 난 기억과 이제 막 회복된 몸으로 꼼짝없이 한 동안 쉬어야 하는 게 마땅하나 혼자라 어디 비빌 언덕도 없으니 맘 편히 쉴 수도 없다. 한시바삐 앞으로 살 길을 찾아야 할 터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주소지를 찾아갔다. 택시를 타고 근처에서 내려 길 찾기 앱의 도움을 받다가 구불구불 좁은 골목길을 헤매었다. 그 길이 그 길 같은 골목 어귀에서 마주친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야 했다.
집을 찾아가는 길이 흔한 골목들이라 낯익은 듯 정겹지만 또 낯설어서 정말 내가 그 집에서 살았던 건가? 아님 그저 주소지만 옮겨둔 건 아니었을까? 계속 의문 투성이었다.
마침내 집 앞에 다다라서야 혼란스러움이 잦아들었다.
분명한 건 집 앞 골목에서 2층 빌라로 걸어 올라가는 그 길이 익숙했다. 이곳에 살았는지까지는 잘 몰라도 집 근처와 장소가 눈에 익어 자주 찾았던 건 분명하다.
반 층 걸어올라 간 계단 구석에 놓여있는 어린이용 세발자전거가 기억에 있었다. 순간 기억의 문이 열린 것처럼 한꺼번에 기억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한 계단씩 걸어 올라가다 자전거를 피해 가는 순간 자연스러운 몸짓이 익숙했다. 흐릿한 머릿속과 달리 장소에 익숙한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아스라하게 기억난다. 이곳에서 살았던 거다, 나는. 물론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관문에 달린 번호키를 보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대책 없이 온 것에 난감했다.
잠시 고장 난 로봇처럼 얼어있다가 당장 갈 곳도 짐도 없는 형편이라 열쇠 따주시는 분이라도 불러야 하나 싶었다. 그전에 생각나는 번호 아무거라도 눌러봐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123456.. 차례대로 눌러보기도 하고 0000, 1004 등등 닥치는 대로 숫자를 조합해 보다가 마지막으로 누른 4자리 번호에 결국 문이 열렸다.
신기했다. 혹시나 해서 누른 내 생일 0911. 이게 비번이었다니.
같이 살았다지만 설마 내 생일로 현관 비번을 썼을 줄이야. 기억에도 없는 낯선 그와의 관계가 막연한 생각보다 더 돈독했던 걸까.
아니다. 911은 119처럼 미국서 사용하는 응급전화번호로 잘 알려진 숫자들이니 그저 우연의 일치일 수도.
우연의 일치인지 운이 좋았던 건지 아무튼 잘 되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버렸다. 워낙 무심하고 둔한 성격이라 깊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여기까지 찾아오느라 잠깐 헤맸던 것에 지쳤는지 몹시 피곤했다. 어서 빨리 들어가 쉬고 싶었다.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벗고 중문을 밀어 열자 바로 환한 거실이 보였다. 커튼이 없어 베란다가 훤히 보이는 거실에는 그 흔한 소파 하나 없이 55인치 TV만 덩그러니 놓여있어 휑했다.
거실을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방이 하나씩 있었고 각각 부엌, 화장실 등이 배치되어 있는 구조라 두 명이 살기에 어느 정도 독립적 생활이 가능한 투룸(방 2개)이었다.
집 전체를 둘러보는데 채 몇 분도 걸리지 않을 공간이었지만 사장인 그 남자가 깔끔한 성격인지 집안은 대체로 잘 정리되어 있었다. 가구나 짐이 적어서 더 그래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사고 이후 계속 비워져 있었기에 곳곳에 먼지가 쌓인 것을 제외하면 집안은 청소와 정돈이 잘 되어 깔끔했다.
우선 양쪽에 나누어진 방 중에 어느 곳이 내방인지부터 확인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만 가진 짐 등을 확인하고 구멍 난 기억부터 채우고 싶었다. 마음이 급했다. 심리적인 문제겠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쫓기듯 어느새 집안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