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들은 연수가 많아요
25년 11월 11일 아침 06시 51분
어제는 서울에 다녀왔다. 그래서 J를 소개하다 말고 챙겨서 나갔다. 오랜만에 압박 면접을 보았다. 경력직으로서 신입과는 다른 나를 어필해야 했다. 퍼포먼스를 어떻게 낼 것이며, 이에 대한 방안은 무엇이 있는지? 과거 내가 잘했다고 할 수 있는 건 무엇이었는지 등. 내 소개나 과거를 자랑할 때 MSG 좀 치고 입에 침 바르고 약간의 과장을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을 지금에서야 해 보지만 그렇게 못한다. 굳이 솔직하다. 그래서 약간 손해 보는 경우도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다시 J에 대해 이어서 소개하겠다. 그런데 지금도 J보단 걸레가 더 먼저 마음속에서 틔어 나온다. 계속 혼용해서 쓸 테니 정신 바짝 차리고 읽으시라.
J는 IT분야에 종사도 했었고, 지금도 그 분야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래서 아이들을 지도할 때 아이패드 등을 사서 수업교재로 쓴다고 했다. IT관련해서 미국에 출장까지 다녀올 정도로 열의가 대단하다. 맞다 J는 학교 선생님이다.
J가 학교 선생님을 준비하던 때가 기억난다. 여름이었고 그때 회사에서 여름휴게소를 운영했었다. 운이 좋게 신청한 것이 당첨되어 나는 친구들과 여름휴게소로 피서를 떠났다. 계곡이 있는 휴게소였는데 도착하니 벌써 먼저 오신 분들이 자리를 잡고 여기저기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우리도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휴가모드로 진입하려 했으나, 계곡으로 진입은 실패했다. 많은 인파와 혹시나 고참 선배들을 보면 어쩌나 하는 나의 걱정이 숙소에서 우리의 피서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계곡까지 와서 굳이 숙소에서 보내려는 나의 마음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친구들도 별 불만 없이 그렇게 하자고 한 건 더더욱 이해가 안 간다. 우린 그렇게 숙소에서 준비해 온 음식을 먹으며 시원한 계곡물의 차가움 대신 에어컨과 선풍기의 인공적인 시원함을 느끼며 피서를 했다. 태양은 확실히 피했다. 실내였으니까.
저녁에 근처 사찰이 있어 J의 합격을 기원하기 위해 숙소를 나와 다 같이 걸었다.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수험생이라는 J가 저녁드라마 내용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거다. 아니 공부하는 학생이 저녁에 드라마를 볼 수 있냐며, 목소리 높여 나무랐고, 걸레는 우리나라 드라마는 조금만 봐도 앞뒤 내용을 금방 알 수 있는 친절한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며 항변했다. 그 말도 되지 않는 답변에 "너 이 새끼" 하며 더 타박을 한 거 같은데, 그런 타박이 작용했는지 그해 걸레는 시험에 합격했다. 그런데 걸레의 그 말. 우리나라 드라마의 친절성에 대해 나는 알게 되어 J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체험할 수 있었다. 우연히 처갓집에 가서 주말 드라마를 볼 때면 몇 번 보면 앞 뒤 내용을 신기하게 알 수 있었다. 물론 가끔씩 왜 저런 거냐며 주변분들에게 물어서 상황을 이해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극 중 스토리가 그렇게 많이 꼬여 있지 않고 무난하게 흘러가는 구조라 걸레의 말이 사실임을 난 알 수가 있었다. 그래도 걸레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타박이 있어 니가 합격을 할 수 있었다고 나는 믿고 싶다.
J는 혼자 큰 집에서 산다. 학생 때는 할아버지의 영광으로 큰집에 살더니, 그런 DNA가 살아 있는지 지금은 혼자인데, 혼자 살기엔 조금 큰 집에 산다. 집에 가보니 커다란 TV, 웅장한 스피커, 빔프로젝트, 여러 IT기기들. 남자의 로망을 다 실현해 놓고 살고 있었다. “성공(?)했다. 이제 장가만 가면 되는데”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야구 시즌이나 스포츠 경기가 있는 날에 J네 집에 가서 치맥 먹으며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고 싶다. 커다란 화면에 웅장한 경기장 응원소리를 들으며 나도 경기장에 있는 것처럼 코스프레하고 싶은데 이놈이 허락을 할지가 미지수다. 뭐 하나 시켜 보려면 드럽게 핑계를 많이 만드는 놈이기도 해서. 하지만 그 마음은 이해가 간다. 새집에 우르르 몰려가면 나 같아도 싫어할 거 같다. 그래서 더욱 해보고 싶다. 예전 K사장이 중고차를 사 왔을 때 우리는 차 안에서 피자를 시켜 먹은 적이 있다. 밖은 추웠고 마땅히 먹을 만한 곳이 없어서 차에서 먹었는데, 그때 K사장도 그랬다. “흘리지 마라 조심해서 먹어라. 니들이 친구니까 허락한 거다” 우리는 장남 삼아 “앗, 그만 흘렸다” 이러면서 놀렸는데 나도 차를 사보고 지인들이 차에서 뭘 먹으려 할 때 K사장의 마음처럼 뭔가 좀 조마조마하고 심장이 요동치는 마음을 느꼈다. 새롭게 맞이하는 물건(차, 집, 전자제품 등)은 한동안 조심해서 다루는 게 맞다. 그런데 친구가 샀다고 하면 괜히 만져보고 싶고, 하지 말라는 것 해보고 싶은데 어쩌란 말이냐?
걸레야 언제 야구 한번 같이 보면 안 될까? 그리고 너 게임기는 안 사냐? 그 큰 화면 그냥 놔둘 거야? 아깝지 않냐? 이제 너의 집은 친구들이 모이는 사랑방으로 바꾸면 안 되냐? 이런 나의 바람을 말해보고 싶은데 저 멀리서 걸레의 답변이 예상이 된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되고, 집에 방문하는 차량은 미리 등록을 해야 되고 저녁 10시 이전에는 나가야 된다고 하면서 일장 연설을 하겠지. 안 되는 사유들을. 그 마음 이해한다. 나중에 시간 좀 지나면 한번 고려해 봐라. 너의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마.
J는 선생이라 방학이라는 특수한 기간이 있다. 방학 때마다 뭐 하냐고 너 방학이 있어 너무 좋겠다고 부러워하는 말이라도 할라치면, 걸레는 무슨 소리냐 방학이 더 바쁘다며 핀잔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헛소리하고 있는 J를 보며 뭐가 그리 바쁜지 이야기해 보라며 추궁한다. A연수 가야 되고 그거 마치면 또 B연수, 연수의 나날이라고. 무슨 초딩선생이 저래 바쁘단 말인가? 뉴스에서 들어본 적 없고, 기사로 읽어 본 적이 없는 이야기를 J가 하고 있으니 모두 어안이 벙벙하다. 그렇게 쌤들이 바쁘다고. 우리 모두 취조하듯 하나하나 짚으면서 간다. 무슨 연수가 그리 많은지 연수들의 내용은 무엇인지. 그러다 우리는 알게 되었다. 방학기간 일어나는 모든 일을 ‘연수’라는 마법의 단어를 사용해 가면서 감추고 있다는 것을. 타 선생님들과 스키 타러 가도 연수고, 저 멀리 타 도시 여행 가도 연수고, 방학 때 뭐만 하면 다 연수라고 하는 것이었다. 어쩐지 너무 바쁜 선생님의 일상이 뽀록 나면서 우리는 걸레에 신뢰등급을 여러 등급 하향조정했다.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저렇게 거짓말을 유창하게 하면 안 되지 않나? 이제 누가 연수라는 말만 해도 ‘또 거짓말하고 있네’라고 속에서는 중얼거린다. 이게 다 걸레에게서 학습된 효과 일 것이다.
여전히 방학이면 연수가 많은 J다. 혼자 바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고 그 열정이 부럽기도 하다. 혼자 만의 삶이라 그럴 것이리라.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고, 걍 부럽기만 했다. 지금의 나도 좋다. 괜히 나의 상황을 강조해 본다.
이번 추석 때는 못 봤는데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연말쯤에는 한번 볼 수 있을까? J네 집에서 따뜻하게 보일러 빵빵하게 틀어 놓고 맛있는 거 잔뜩 먹고 어지럽히고 싶다. 걸레야 난 왜 이럴까? 자꾸 장난을 치고 싶네. 오늘도 교단에서 열심히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너를 응원하며, 너의 소개를 짧게 마쳐본다. 마치려고 하니 ‘빨대’가 빠졌네. 이건 고이 묻어 두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