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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빛 Jul 06. 2024

안 하고 싶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고 싶다.

끈적끈적한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청소기로 돌리지 않아도,

싱크대 개수구에 낀 음식물 찌꺼기를 탁탁 털어서 버리지 않아도,

쓰레기통 뚜껑이 닫히지 않을 만큼 수북이 쌓인 쓰레기들을 똘똘 묶어 버리지 않아도,

현관문에 쌓인 플라스틱 용기와 찌그러진 캔들을 스티로폼에 가득 담아 들고나가지 않아도,

신발장에 마구 쑤셔 넣은 신발들을 정리하지 않아도,

닫히지 않는 서랍의 마구 뒤엉켜있는 속옷들과 양말을 분리하지 않아도,

침대 위에 놓여 있는 책들이 구석으로 툭하고 떨어지는 순간 침대를 밀고 꺼내지 않아도,

침대 밑에 가득 쌓인 먼지들이 켜켜이 보이지만 슬쩍 눈감지 않아도,

더 이상 걸 수 있는 옷장의 공간이 없는 틈새에 대충 쑤셔 넣은 옷들을 다시 다리지 않아도,

아이라이너, 마스카라, 화장솔, 볼펜, 귀이개, 손톱깎이, 눈썹칼이 담긴 통에서 브로우를 꺼내다 쏟은 것을 정리하지 않아도,

약상자에 뒤죽박죽 놓인 정체불명의 약들을 효능에 따라 분리하지 않아도,

욕실에 쓰다 남은 바디워시와 몇 년 전에 산 지 모르는 샴푸, 트리트먼트, 클렌징 폼들을 용기에서 제거한 후 분리 배출하지 않아도,

유통기한 지난 화장품과 그렇지 않은 화장품을 구분해서 쓰지 않아도,

출근을 앞두고 알람을 5분 후로 설정하지 않아도,

전철을 놓칠세라 굽 높은 신발을 신고 뛰지 않아도,

손에 든 물건이 너무 많아 정작 교통카드를 들고 가다 떨어뜨리지 않아도,

15초를 남기고 건널목을 건너지 않아도,

정류장을 방금 떠난 도로 한가운데 서있는 버스의 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그러다 문득 생각난 어머니, 아버지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지 않아도,

오늘 먹을 저녁 반찬을 걱정하지 않아도,

이번 달에 쓴 카드 값과 벌이의 뺄셈을 하지 않아도,

회식 자리에서 1/N을 생각하지 않아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누가 더 잘 살고 있는지 경쟁하지 않아도,


그래도 괜찮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게 아닌

그런 삶이어도

괜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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