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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은 Oct 20. 2021

스물아홉의 마지막 하루

거봐, 반짝반짝할 거랬잖아.

2020년 12월 31일.

그날은 이상하고 아름다운 날이었어. 반짝반짝할 거라는 내 말에 힘을 보태주는 자매들.

퇴근하고 동대구역에서 셋째랑 만나서 같이 집으로 가기로 했다.  먼저 도착한 나는 동대구역에서 나름 중간 지점이라고 생각하는 올리브영 앞에서 셋째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로는 올리브영에서 퍼지는 향수 향이, 앞으로는 대구에서 유명한 빵가게들의 빵 냄새가 후각을 어지럽히고 있을 때 '하은!'하고 부르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당연히 셋째가 서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 꽃다발을 내밀면서. 갖가지의 노란색을 한 아름 건네며 못내 아쉬운 투로 편지도 써주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었다, 말하는 셋째다. 여기서 네가 미안한 부분이 어디였을까. 머릿속으로 되감기를 해 봐도 나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진득한 꽃향기가 품 안에서 은은히 퍼진다. 그때 셋째는 까먹은 게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아, 그거 꽃말 [기억될 오늘]이야."


셋째는 줄 곳 나의 서른을 기대했었다. 스물아홉을 허투루 보내지 않길 소망했고, 사소한 날을 특별하게 꾸며주기도 했었다. 그날처럼 꽃을 이유는 없이, 의미는 담아서 내게 선물하곤 했다. 반짝일 거라 장담했던 말에 향기가 묻는다. 그날의 기억에 노란 물이 배였다.


저녁엔 첫째가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목적은 스타벅스 DT에서 커피 마시기. 목적지는 가고 싶은 곳이었다.


"경주 가자!"


커피 한 잔씩을 들고 경주를 벗어난다. 커피 한 잔을 위해 경주 드라이브를 다녀온 밤. '아니'라는 대답이 없는 길을 달렸다. 집에 도착하니 첫째가 부산스럽다. 자꾸 화장실을 가라고 했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빨리 똥 싸러 가라고 했다. 노란 꽃을 보느라 생리 현상쯤은 미뤄두는 나에게. 그러다 뒤통수에 한숨과 웃음이 섞인 다채로운 감정이 꽂힌다.


"에휴, 쟤는 언제부터 눈치코치가 저렇게 없었냐?"


첫째가 셋째에게 하는 말이었다. 셋째는 졸린 눈을 부릅뜨면서 나를 한심하게 바라본다. 서프라이즈로 선물을 주고 싶었다고, 낭만이라곤 없는 사람이라며 타박을 주면서도 선물을 전달하는 두 자매의 표정은 한 껏 상기돼 있었다. 다정하지 않은 말들 속에 다정함이 전해진다.


그때 첫째가 선물의 주인인 나 보다 더 설레어서 얼른 풀어보라 재촉했다. 시계와 팔찌가 귀함을 뽐내는 상자에 담겨 있었다.


"의미가 있어!"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첫째.


"시계를 선물한 건, 앞으로 시작될 너의 삼십 대의 시간이 모두 값지길 바라는 의미로 시계를 선물하는 거야."


시계의 분침이 움직인다. 값진 1분이 흘렀다. 동그란 스티커 두 개가 붙여진 편지도 뒤늦게 전해주는 첫째. 스물아홉의 마지막이 거창하다. 어떤 이유를 붙여도, 아무 바람을 달아도 끄떡없을 날이었다. 다 이루어질 것처럼.

예약 해 뒀던 렌터카를 끌고 다시 경주로 가는 길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끝까지 마중을 하던 자매들을 뒤로하고 필름 카메라와 편지, 필기구로 묵직한 백팩을 보조석에 싣고 여행길에 올랐다. 혼자가 되어 쏟아진 사랑을 가지런히 정리해 본다. 텅빈 도로 위에 빨간 신호보다 반짝이는 별 안에서 청명한 빛으로 빛나는 보름달. 이상하고 아름다운 날이다. 보름달은 경주로 가는 길을 동행했다. 경주에서 스물아홉 그리고 서른의 첫눈을 봤다. 그렇게 소원하던 함박눈을. 이미 거창하게 시작된 하루는 어느 것 하나 의미 없는 일이 없었다. 아무렇게 특별해지고, 무턱대고 희망찼다.


지아와 유승이 만들어준 기적 같은 연말과 새해였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날.



"거봐, 내가 반짝반짝할 거라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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