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원클라쓰
드라마 ‘이태원클라쓰’, 알록달록 반짝이는 거리의 풍경이 낯선 이태원. 그 공간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첫 장면, 주인공 박새로이는 전학한 학교에서 친구를 무자비하게(적어도 나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새로이의 상대역인 장가라는 기업의 아들 ‘장근원’은 같은 반 아이의 머리채를 잡고 사물함 쪽으로 치면서 무언가를 들이붓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고, 심지어 경악할 것은 담임교사도 그 광경을 모르는 척했다.) 폭행하고 있는 장근원을 맞닥뜨린다. 장근원의 이러한 행동에 반응한 것은 박새로이가 유일했다. 재벌 2세라는 이유로 모두가 보지 않은 척을 하는 광경에 유일하게 반기를 든 것이다. 박새로이는 장근원에게 ‘그만하지? 친구에게 그러면 안되잖아, 재벌 2세는 양아치 짓 해도 되냐’라고 말한다. 이에 장근원은 ‘뭐? 내가 누군지 아냐’는 식의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도 이를 무시하는 장근원을 박새로이가 때리게 된다.
전학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박새로이는 교장실로 불려 가고 자신의 아버지가 근무하는 회사의 사장과 마주한다. 장근원의 아버지는 박새로이에게 네가 무릎을 꿇고 내 아들에게 용서를 빈다면 오늘 일은 넘어가겠다고 하지만, 박새로이는 ‘잘못한 것이 없다’며 거부한다. 이렇게 박새로이는 퇴학을 당하고 아버지 또한 20년 넘게 근속한 회사를 나오게 된다. 박새로이의 아빠는 이날 아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내가 20년 넘게 살면서 지켜오지 못한걸 네가 이뤘다며 잘했다고 이야기한다. 박새로이와 아빠가 지키고자 한 가훈, ‘소신 있게 살기’는 무엇일까.
아주 당연하게 혹은 용감하게 정의롭게 불의에 맞서는 영웅과 같은 박새로이가 나는 왜 눈엣가시처럼 걸렸을까. 눈에 걸리다 못해 그가 진지하게 말하는 ‘소신 있게 살기’가 왜 기분 나빴을까 드라마 속에서 박새로이의 대사가 내레이션처럼 흘러나왔을 때 나는 머릿속으로 ‘아... 저 소신, 나는 너무 싫다’고 되뇌었다. 박새로이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용기 있는 행동을 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역사는 그런 용기 있는 몇 사람의 힘에 빚을 진 채 지나왔다. 감사해도 모자랄 판에 나는 왜 ‘그 소신이 뭘까. 난 그 소신 너무 싫네.’ 되뇌었을까.
박새로이는 이를 시작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맞고 가해자인 장근원을 폭행한 죄로 전과자가 된다. 장근원의 아버지 장대희는 교도소에 면회를 와 다시 한번 더 아들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라고 한다.(왜 이 재벌 사장은 무릎 꿇고 사과하라는 주문을 계속하는 걸까?) 그러나, 우리의 남주 새로이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 무릎을 꿇어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라는 대사를 치며 교도소 유리벽에 머리를 격하게 박으며 분노를 불태운다. 동시에 장대희는 ’ 소신, 패기, 없는 것들이 자존심 지키자고 쓰는 단어, 이득이 없다면 고집이고 객기일 뿐이라 ‘는 말을 남기며 유유히 교도소를 떠난다. 새로이는 이로서 드라마의 시작에 섰다. 중졸에 퇴학, 전과자, 아버지를 잃었다.
이태원 클라쓰는 어떤 클라쓰일까. 재벌-장대희-장근원-주인과 장근원(돈) 부리는 개 중심의 세계관을 가진 한축과 박성열(이제 죽었지만 남주의 정신적인 축인 아버지)-박새로이-소신 있게 살자는 세계관을 가진 한축이 아주 강렬히 맞선다. 두 남성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은 서로 싸운다. 장대희는 장남인 장근원에게 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놈은 가축이라고 한다. 미안한 마음을 갖지 말라고 교육을 한다. 돈으로 움직이는 밑 사람들을 개라고 생각하라며 닭 모가지를 비틀 듯, 가축을 죽이듯 미안함을 버리라고 한다. 이에 맞선 소신 있게 살자는 축은 박새로이 혼자다. 그러나, 아주 강렬하다. 무릎을 꿇지 않은 대가로 모든 것을 잃었다. 분노가 모든 것을 망칠 법한데 어떤 이유에선지(어디에서 도를 닦았는지) 장대희를 만나고 분노에 날을 새운 새로이는 한줄기 빛을 만난다. 이것이 분노인지, 돈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죄를 졌으니 벌을 받고, 징역을 살고, 원양어선을 타고 돈을 벌어온 새로이는 억울한 자신의 현실을 이상하게 아주 잘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자세한 과정이 생략되었으니 ‘아주 잘’은 나의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잘’에 해당하는 나의 느낌은 ‘매우 많이 참으며 그렇지 않은 듯 자신의 감정을 잘 감추며’가 더 정확하겠다. 새로이는 현실 사회에서 더 이상 갱생하기 힘들다. 학벌을 잃었다. 가족을 잃었다. 시간을 잃었다. ‘소신’만이 하나 남았다. 2020년 한국사회에서는 갱생이 아니라, 깊은 땅 속에서 퇴적암으로 굳어있기도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속 새로이는 원양어선을 타고 돈을 벌어와 이태원에 가게를 열고, 장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원대한 계획이 나온다. 아버지 죽음의 가해자인 장근원을 처벌하기 위한 15년짜리 계획 말이다.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져질 지 모르겠다. 이제 시작이다. 복수와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두 세계관과 두 아들이 싸운다. 여기에 한축인 ‘소신 있게 살자’는 아주 가치 있는 말이며, 지키고 싶으며, 매력적이지만, 철저히 참을성 있어야 하는 ‘남성 중심’이다. 눈물을 삼키고 살아가야 하는 ‘남성 중심’이다. ‘이태원 클라쓰’는 삶의 중심, 힘의 중심이 남성을 향하고 있다. 마치 소신이라는 것은 ‘남성’만이 가질 수 있는 듯 말이다. 물론, 이 드라마에는 멋진 여성들이 있다. 박새로이의 옆에는 두 명의 여성이 중심인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박새로이의 옆이기에 존재하는 캐릭터일 뿐 아닌지 의심스럽다.
중학교 교실에서 교사인 어른마저 모른 척했던 상황에 왜 새로이를 맞서도록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박새로이는 왜 사장과 맞서야하는 것일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킬 수 없는 소신 따위 왜 보여주는 것일까. 그런 것은 애초에 소신이 아니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어른이 지켜주지 않을 때 너도 나서지 말라고,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나의 소신’을 말할 것이다. 맞서지 않는 어른에게 모욕을 주는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남자라서 지켜야 하는 소신, 남자라서 할 수 있는 소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2020년 한국사회에서 유일한 생존 도구일 것 같은 학력과 가족 모두를 잃은 박새로이는 이제 이태원이라는 사회에 놓이고 가족이 아닌 누군가를 만난다. 그 누군가들이 박새로이와 어떻게 어울려갈지 지켜볼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남성’인 박새로이를 중심에 둔 구도라면 재미없다. 주변의 캐릭터들이 그의 소신을 중심으로 그의 ‘소신’을 영웅시하는 도구라면 더더욱 재미없을 것이다. 울고 싶은데도 울지 못하는 남성을 또 한 명 키우는데 불과할 테니 말이다.
4월 21일 덧글, ‘이태원 클라쓰’는 끝까지 볼만큼 재미있었다. 그러나 2회까지 보고 이 글을 처음 썼을 때 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박새로이는 오수아를 백수로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남성’이었고, 조이서는 박새로이를 일으켜 세워주기 위해 존재하는 여성이었다. 2020 총선에 나온 홍준표는 박새로이와 자신이 같은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혹자는 무엇이 같냐며 웃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말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라 동의했다. 그는 역경을 이겨낸 ‘남성’이기 때문이다. 홍준표의 ‘소신’과 박새로이의 ‘소신’은 그렇게 동일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