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남자의 기억법
어제 종영한 <그 남자의 기억법>은 과잉기억 증후군으로 살고 있는 앵커 이정훈의 이야기이다. 그는 생애 모든 날들을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기억하면서 살아야 하는 뇌을 가지고 있다.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언뜻 들어 ‘오, 좋겠다’ 싶다.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적어도 꼭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는 일 따위는 없지 않겠나. 그러나, 드라마는 잊어도 좋을 것, 혹은 잊으며 살아야 할 것을 잊지 못하는 주인공의 아픔에서 시작한다. 첫사랑의 죽음에 대한 기억, 그것도 본인이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 본인의 차 앞으로 떨어지는 사랑하는 사람,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나는 연인, 그 위로 떨어지는 눈발. 이정훈은 이 날의 날씨와 자신의 감정과 모습을 마치 지금 일처럼 기억한다. 그래서, 그때를 떠올릴 수 있는 한 가지 단서에도 몸이 굳어버린다. 어찌 그렇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도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내일을 살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내일을 살아가야 할까. 살아가기 위해 하루하루 이성에만 의존하며 흔들림 없이 살아가던 주인공은 본인과는 반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아픔에 과거를 잃어버린 여하진을 만난다.
누군가를 통해 용기도 얻고, 살아가야 할 이유도 찾고, 과거를 놓고 사는 법도 배운다. 그 과정은 실로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에게 잘못한(상처 준) 일들 때문에 트라우마를 겪기도 하고 두고두고 아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순간 또한 당사자의 선택이었음을 누구도 아닌 당신이 그렇게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드라마는 말한다.
그럼에도 나는 공감할 수 없었고 거부하고 싶었던 스토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주인공인 앵커 이정훈의 어머니였다. 이정훈은 어머니를 ‘나의 생에 아름다운 기억밖에 없는 분’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기억만 남긴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본인의 병을 숨기고 수술 전날 이정훈을 만난다. 그리고는 모든 일이 끝나면 모든 것을 말해주겠다고 한다. 아무 일 없는 듯 그들은 함께 저녁을 먹고 헤어진다. 다음 날 이정훈은 여하진이 지인을 만나러 가는 병원에 우연히 함께 가게 되고 병원에서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아버지가 왜 이곳에 계시나 싶었던 이정훈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고 그곳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장례식장이다.
드라마를 보는 나에게 그 장면이 충격이었다. 아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를 이해해야 했다. 아들의 기억에 나쁜 기억, 슬픈 기억, 아픈 기억을 남겨주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 아버지가 어렸을 때 아들의 특별함 때문에 아들을 옷장에 가두고 학대한 대신 어머니는 늘 아들에게 인자한 웃음과 온화한 미소와 따듯한 말로 기억되었다. 아들이 기억하는 과거의 어머니를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언제까지 우리는 드라마에서 이렇게 무한한 희생의 대명사인 어머니를 그리고 있어야 할까. 어머니는 왜 그러한 인물 이어야 할까. 그렇지 않으면 스토리는 이어질 수 없을까. 주인공 이정훈은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어머니의 인생은 아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 그래야 선한 것일까. 누가 그러한 당위를 강요하는 것일까.
드라마, 문화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적 관습은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의 반영이기도 하고 역으로 인식을 전환해가고 균형을 잡아야 하는 나침반이 될 때도 있다. 문화라는 것이 무의식, 의식의 기반을 흔드는 공감을 기본으로 하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드라마니까 그렇지, 웃자고 하는 이야기에 뭘 그리 따지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무한한 희생의 대명사로 그려지는 어머니의 모습을 반대한다. 부모의 역할과 도리 이상의 ‘신성한 뭔가’를 만들 듯 어머니를 가공하지 않아야 한다. 문화 속에서 이렇게 만들어진 ‘어머니’는 수많은 어머니들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하고, 이미 그렇게 살고 계심에도 많은 어머니들은 당신 자신에게는 냉혹하고, 자식들의 불행 앞에서는 자책감에 가슴을 치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자신을 자책하고 늘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미안해하는 어머니를 보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며, 살고 있지 않다.
어처구니없는 모성애 없이도 <그 남자의 기억법>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자신의 상처와 아픔에서 어떻게 한걸음 한걸음 걸어 나오는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아픔에 빚진 옆사람에게 “너 때문이 아니다. 나의 선택이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미안해하지 말고 마음 아파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응원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많은 주옥같은 대사가 있지만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앵커 이정훈이 방송대상을 받으며 한 수상 소감이었다.
“지나간 시간보다 다가오는 날들에 더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응원합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었는지 가슴에 남았다. 나에게도 주변의 누군가에게도 진심으로 전하고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