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더위 전에 발찌를 하나 샀다. 각인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각인은 예전부터 마음이 끌렸던 ‘no need to sparkle’로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 중 하나로 했다. 나는 의문과 함께 끌렸었다. 왜 반짝일 필요가 없는 거지? 난 아직도 반짝이고 싶은데. 한여름 태양 아래 유리알처럼 말이다. 눈이 부셔 저절로 눈이 감 길듯. 각인의 문장은 그렇게 반어적이었다. 울프의 말과 나의 말.
<빛나는 순간>을 보기 전에 나는 그런 반짝임을 기대했다. 고두심의 얼굴에서 보일 반짝임 또는 그의 캐릭터에서 내가 읽어낼 반짝임.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반짝임은커녕 중간 이후 지루함에 언제 끝나나 했다. 캐릭터의 스토리와 대사는 작위적이었고 두 주인공의 관계는 내내 오글거렸다. 영화를 보고 나서 왜 이리 오글거리나 하다가 내가 너무 선입견이 커서 그런가 다시 한번 영화를 떠올려 보았다. 괜찮은데, 영화는 괜찮은데 그저 나의 굳은 선입견 때문일지 모른다는 의심. 그러나 그렇게 아무리 의심해봐도 영화는 음악이든 캐릭터든 스토리든 어느 것 하나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빛나는 순간을 보고 싶었던 나는 그렇게 실망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나고 문득 나의 답답함과 실망이 이것 때문이었구나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유난히 조심스러워하는 모습, 지지부진한 모습 말이다. 선입견은 내가 가진 게 아니라 영화가 가진 것이었다. 당신을 만나고 비로소 알게 된 나의 빛나는 순간이라는 타이틀의 영화 <빛나는 순간>은 70대여와 30대남의 멜로가 중요한 중심축이다. 그럼에도 그 멜로의 흐름은 서로의 상처를 알아간다는 보다 (인생의)가치적인 내용으로 다가간다. 우리에게 사랑이 언제 그렇게 가치적으로 다가왔었나. 나중에 되돌아보면 그렇게 가치적으로 맞아떨어졌던 누군가도 시작의 눈맞음은, 교감은 뭔가 이상한 거 아닌가? 나도 눈치채지 못하는 끌림과 신경 쓰임, 때로는 나를 읽어주는 타인, 나와 교감되는 타인. 70대여와 30대남은 그러면 안 되는 건가? 혹은 그럴 수 없는 건가?(나는 정말 아직 잘 몰라서....)
그러나 시작은 뭐, 그렇다 치더라도 그다음은 왜 없나. 사랑의 그다음은 참 지지부진했다. 구렸다.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가려는 설정은 참. 뜬금없는 도피. 이상한 스토리였다. 나이 많은 여자와 어린 남자와의 과감한 시도 정도로 의미가 있나. 답답함은 어쩔 수 없다. 그 답답함이 뭔가 했더니. 영화에서 내내 조심스러워하고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눈이 맞을 수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빛나는 순간이 될 수 있을까?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렇다는 것일텐데 답은 모호해보인다. 그럼에도 <빛나는 순간>에서 내가 본 반짝임이 있다면 ‘가슴떨림’ 정도라고나 할까.
누구에게나 관통하는 가슴떨림의 순간 말이다. 놀라는 순간의 가슴떨림, 흥분한 순간의 가슴떨림, 아름다운 순간의 가슴떨림, 욕망의 순간의 가슴떨림, 안타까운 순간의 가슴떨림, 슬픔의 순간의 가슴떨림, 선택의 순간의 가슴떨림, 그리움의 순간의 가슴떨림. 가슴떨림이 오는 순간이 ‘반짝임’의 순간이었다. 반짝일 필요없이 그냥 반짝이는 순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