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읽아웃 만화가 다드래기 편을 듣고
‘정없다. 맏며느리같다.’ 어찌보면 모순적인 두 말을 함께 들으며 성장했다. 맏딸이었던 나는 동생을 잘 챙기거나 돌봤던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혹은 부모에게 살갑게 나를 내놓지도 못했고 부모를 먼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커오면서 뜨문뜨문 어른들에게 정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도 정없고 싶지는 않아’라고 생각했다. 맏며느리처럼 생겼다는 말은 외모에 대한 칭찬으로 여겼다. 그냥 예쁜 말이것거니 하다가, 내가 그렇게 순종적으로 시키는 일을 잘할 것처럼 보이나 싶은 생각에 나이가 들면서 반감을 가졌다. 그렇게 저렇게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나에 대한 말들. 지금 생각하면 그저 그런 주변의 오지랖들이었다.
그럼에도 정없는 나는 어른이 되어 나의 아이를 낳고 다른 이의 아이들까지 돌보며 나같은 사람은 아이 돌봄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이 키우는게는 정이 아니라 아이의 신호(말)를 제대로 보는 눈이 더 필요하고, 나를 돌보는 체력과 마음이 더 필요한 것을 뒤늦게 알았다. 지금까지도 아이를 돌보는 일의 중심에 있는 나는 정은 없지만 아이들을 향한 제대로 된 눈하나 튼튼하게 지닌 사람이고자 한다.
팟캐스트를 듣다가 ‘정’이라는 단어에 귀가 솔깃했다. 어떤 맥락이었는지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정이 있어야 공동체냐? 뭐 이런 문제제기였던 것 같다. 혼자 살면서 입원한 이야기로 그림을 그린 만화가는 살면서 중요했던 건 정에 의지한 특정 누군가가 아니라 모르는 누군가에게라도 도움을 청하고 받을 수 있는 일상적인 제도, 정보가 중요하더라는 뭐 이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사실, 아닐수도 있다. 아, 다른 이야기였다면 나의 인지능력을 의심해야한다.) 여튼, 오늘 아침 팟캐스트를 듣다가 그렇게 ‘정’이라는 단어 하나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정이라는 단어와 이것으로 맺어지는 관계에 불편함이 컸나보다. 글을 쓰자니 다시 머리 속이 복잡하다. 관계에서의 힘의 불균형과 연결되면서 씨실과 날실의 불편함이 서로 내가 먼저네, 니가 먼저네 다투는 모양새다. 힘의 불균형, 그러니까 누군가의 일방적인 노력으로 유지되는 관계의 문제는 제외하고 (나쁠 것 없는)정이 가득한 관계에 나는 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첫째는 아마도 나란 인간이 정없는 사람이란걸 잘 알아서인 것 같고 둘째는 그런 나란 사람이 정 있는 사람이 되(고싶었고)어야한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쏟았던 감정적 물질적 노력과 그 시간들을 바라보면서 가지게된 생각인 것 같다.
가족이나, 알고 지내는 친한 이웃이나 뭔가 관계를 맺는 누군가 정도가 되어야 도움을 받거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누군가에게도 내가 필요한 무언가를 청하고 주고 받을 수 있을 씸플함이 있기나 할까. 그런 제도를 공동체를 우리는 만들 수 있을까. 공동이라는 것도 그렇고, ‘체’라고 하니 우격다짐으로 밀어넣는 하나의 몸뚱아리 같아서 고리, 선, 점, 이런 단어들로 부르고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