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축제] 첫 번째 이야기
나의 이름은 '하영' 대신 '나영'일 뻔했다. 우리 집안의 돌림은 '영'이고, 나보다 몇 달 먼저 태어난 사촌의 이름이 '가영'이니 가나다순으로 이번엔 '나영'이 되어야 한단 큰할아버지의 말씀. 하지만 나의 엄마는 '나영'이란 이름이 너무 싫었고 ('전나영'은 세게 부르면 어쩐지 욕 같은 이름이긴 하니까.) 큰 결단을 했다. '영'이란 돌림은 지키되, '하영'이란 이름으로 짓겠노라고. 결국 나는 연꽃 하, 영화로울 영, 꽃처럼 영화롭게 인생을 살아가라는 뜻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큰 어른의 말씀을 거스른 엄마의 용기 덕분에 난 내 이름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내가 태어나기 직전 그러니까 만삭일 무렵에도 엄마는 떡집에 나가 선 채로 개피떡을 빚었다. 나를 낳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엄마는 다시 같은 자리에 서서 떡을 만들어야 했다. 그런 엄마에게 작은 위안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엄마의 딸인 내가 아주 순한 아가였다는 것. 나는 배가 고파도 울지 않았고, 하루 대부분은 누워 있거나 잠을 자는 아기였다. 뒤통수가 눌릴까 싶어 옆으로 돌려놓아도 금세 다시 하늘을 보는 자세로 돌아왔다고. 도넛 베개를 베고 있을 때에도 아무런 미동이 없어 베개 모양으로 뒤통수의 가운데 부분만 톡 튀어나와 엄마를 놀라게 했을 정도로 고요했다. 스스로 몸을 가누고 앉아 있을 정도의 힘이 생겼을 땐 방앗간의 빨간 대야에 나를 앉혀두고, 과자를 손에 쥐여주면 몇 시간이고 같은 자리에 앉아서 혼자 놀았다고 한다. 정신없이 일을 하던 엄마가 문득 나를 돌아보면 유난히 긴 속눈썹엔 콩고물이 눈처럼 소복이 쌓여 있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의 노력이 필요하다'란 인디언의 속담이 있다. 매일 떡집에서 홀로 노는 아이를 안타깝게 여긴 시장 상인들은 그때부터 나를 데려가 보살펴주었다. 나에겐 마을이 곧 시장이었던 셈이다. 밤늦게 방앗간의 불이 꺼진 후 엄마는 쌀가게로, 신발 가게로, 나를 찾아 나섰다.
내가 태어난 10월 10일 이후로 많은 변화가 있었겠지만, 특별한 건 나처럼 우리 가족 모두에게 새로운 이름이 생겼단 사실이다. '하영 엄마', '하영 아빠’, '하영 할머니', '하영 삼촌', 가족들은 나의 이름을 지은 후부터 다른 이들에게 새롭게 불렸다. 모두가 이른 새벽부터 모여 일하는 떡집도 엄연히 '동화 떡집'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걸려 있었지만, 단풍이 물들 무렵부턴 시장 사람들에겐 그저 '하영이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