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축제] 두 번째 이야기
"자네가 송편을 만들어 주면, 내가 장에 가서 팔게." 어느 날, 같은 동네에 살았던 돼지엄마(이유는 모르겠으나 마을에서 이렇게 불리었다고 한다)란 분은 할머니에게 제안을 한다. 그 순간 할머니는 평생 떡과 가까이 살게 될 줄 알았을까.
할머니는 어릴 적부터 집에서 만들던 방식대로 송편을 만들고 연탄불에 쪄서 돼지엄마에게 전하면 500원을 받았다. 그때 당시 쌀 한 말 가격이 약 1200원. 동업이 끝난 뒤로도 할머니는 여전히 송편을 만들어 이곳저곳에서 팔았고, 우연한 기회로 현대시장에 자리를 얻어 떡 가게를 열게 된다. 다른 이의 방앗간에서 떡을 만들어 홀로 장사를 하던 할머니는 몇 년 뒤 그 방앗간을 인수했고, 아빠와 작은 아빠가 할머니를 돕기 시작했다. 을지로의 회사를 다니던 엄마도, 악세사리 가게를 하던 작은 엄마도, 결혼 후 자연스레 떡집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아직 깜깜한 새벽, 시장 골목에서 제일 먼저 불빛이 켜지고 가장 늦게 꺼지는 곳은 동화떡집이었다. 맞춤 떡을 만들기 위해선 이른 시간부터 전날 불려둔 쌀을 빻고, 김을 올리고, 떡을 쪄야 했으니까. 떡을 만드는 건 요리와 같아서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하고, 모든 공정에 사람의 세심한 손길이 더해진다. 대부분의 결혼식 피로연장에서 갈비탕이나 국수 한상차림을 대접하던 시절이라 주말이면 맞춤이 더욱 늘어나 온 가족이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게다가 시장 안의 다른 떡집들까지 우리 방앗간에서 방앗삯을 내고 떡을 만들었기 때문에 늘 바쁜 날들이었다.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떡을 만든 세월만큼 단골손님들이 꾸준히 늘기 시작했다. 이사를 가도 이 맛이 그립다며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고, 가까운 내 친구의 어머님 또한 친구를 임신했을 무렵, 매일 떡을 사러 왔었단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처음 동화떡집의 문을 연 해가 1973년. 우리 가족이 지금 그 자리에서 떡을 만든 지도 어느새 47년이 흘렀다. 분명 가장 가까운 곁에서 지켜보았지만 소리 내어 세어 보아도 감히 믿기지 않는 역사가 그곳에 쌓여 있다. 그 자리에 가장 오래 머문 할머니를 꼭 안으면 언제나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