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작년이 되어버린 2023년 말, 돌이 빈틈없이 꽉 차서 더 이상 들고 다닐 수 없게 된 쓸개를 놓아주었다.
처음엔 소화 불량인 듯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위염인 듯 위염 아닌 위염 같았던 나의 담낭. 원래도 '담력 있는 사람', '담대한 사람'에서의 씩씩한 '담낭'역할을 제대로 하진 못했지만.. 이젠 돌로 가득 차다 못해 딱딱하게 쪼그라들어 그냥 두면 안 되겠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그만 꺼내기로 하였다. 말로만 듣던 '쓸개 빠진 놈'이 된 것이다. 쓸개를 보내고 나서야 으른들이 많이 쓰시는 그 말의 사전적인 뜻이 궁금해져 찾아보니 '줏대가 없고 허허실실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못한 사람을 속되게 부르는 말'이라 한다. 나는 줏대 없고 정신없는 사람이 되어 2024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명실상부한 '쓸개 빠진 여자'. 분명히 좋은 말 같아 보이진 않는데.. 이상하게도 해방감이 드는 이 말이 썩 나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이제 진짜 쓸개가 없으니까. 마음껏 눈치 보지 않고, 줏대도 좀 없이 허허실실, 약간은 정신없게 살아도 된다는 인정을 받은 기분이다. 기간제의 신분으로 늘 평가받고 있는 듯한 긴장감을 안고 살았다. 다음 계약에 영향을 미칠까 주어지는 일들은 거절하지 못했고, 나의 잘못이 아닌 일들로 조그마한 이슈라도 되면, 행여나 부정적 여론이 형성될까 봐 허점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완벽주의적 가면을 쓴채 살아왔다. 그런데 이걸 모두 한 세트로 내려놓을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싶다. 난 쓸개 빠진 녀자니까.
대충 살자. 귀가 있어도 관자놀이에 헤드폰 낀 아서처럼 (그림출처 : '내 친구 아서')
담임을 할 때마다 '초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라'는 선배 선생님들의 진심 어린 조언들을 들어왔었다. 원리 원칙에 충실하고 철저한 교사의 모습을 보여주다 다정한 모습이 나타나면 아이들은 열광한다. 반면 세심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일관하던 교사가 혼을 내고, 무리한 부탁을 거절하는 모습을 보면 배신감 들어하며 서운해하기 마련이어서 선배들은 그런 조언을 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명하지 못한 나는 포커페이스 유지를 실천하지 못하고, 후회하고 쩔쩔매는 무한궤도를 밟았더랬다. 비실천과 후회의 루프를 걸으며 '나는 교훈이 없는 인간인가'를 심각하게 반복했던 과거. 마음이 앞서 아가들의 긴장을 풀고 어르고 달래주다, 늘 후반부에는 서운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또다시 '올해는 강렬한 카리스마의 포커페이스 새 인간으로!'를 다짐하곤 했다.
올해는 이 다짐마저 쓸개와 같이 버리련다. 그냥 이렇게 생긴 사람인데 아닌 것처럼 다른 사람의 탈을 쓰고 전전긍긍하느니, 흘러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나대로 자연스럽게 지내고 싶다. 초반부에 다른 사람이 되려 애쓰느라 에너지를 들이는 것과, 후반부에 끝심 부족으로 더 잘 버티려 에너지를 들이는 것, 그게 그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림 출처 :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하완 작가
조금 엉뚱한 기대를 해 본다. (목표라고 하기엔 너무 부끄러우니 '기대'정도에서 갈음해 본다.) 더 허허실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능글능글 살아가는 내 2024년의 모습을 말이다. 앞 글 '많은 일감은 나를 키우는 걸까'에서 심각하게 고민하며 '어디까지 받아줘야 할까', '많은 일감은 나를 정말 키우는 걸까' 투덜투덜 고민하던 모습은 쓸개와 함께 보내버리고 올해는 소탈하고 여유로운 인간이 되어보자 한다.
덜 갖추고, 덜 완벽하게, 더 편하고, 더 풀어져서 2024년을 보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김수현 작가님의 에세이집 제목처럼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보내는 게 올해의 목표라면 목표가 되겠다. 마음먹는다고 한 번에 되지는 않는다는 걸 알기에, 그 조차도 애쓰지 않고 흐르듯이 천천히 가자 싶다. 강제로라도 여유롭고 편안한 나의, 모두의 2024년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