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한파는 올해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틀 뒤의 수능을 준비하기 위해 아이들과 교실을 정신없이 꾸린 하루였다. 얼굴도 모르는 수험생들이지만, 얼마나 간절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시험에 임할 줄 알기에 무엇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다. 칼각 책상을 맞추고 수험생 유의사항을 일정한 간격으로 부착하고도 어디 더 뭐 없나 끊임없이 살핀다. 몇 날 며칠 동안의 청소 대장정에 녹초가 된 아이들에게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려주니 신이 나서 돌아갔다. 겸직 신고하고 허가받은 사이드 프로젝트들로 벌어들인 넉넉한 수입. 아이들 간식을 고민 없이 턱턱 사줄 수 있게 된 것도 나의 기쁨 중의 하나이다.
감독관 연수를 받으러 가야 하지만, 아직 1시간의 여유가 있다. 오랜만의 신체 노동으로 지치지만, 새로 인쇄 들어갈 역사 논술 교실의 교재 퇴고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교재가 얼른 나와야 소속 선생님들을 교육할 수 있고, 선생님들이 내년 수업을 준비하실 수 있으실 테니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집중하자 스스로를 다독인다. 고심했던 수행평가 글쓰기 문제들을 갈무리하고 보정하여 펴낸 중고등학교 버전이 논술 고사의 확대로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번 초등학생 버전을 통해 많은 아이들이 역사에 흥미를 갖게 되고, 생각의 깊이를 더하게 되는 기회로 쓰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과거 인물들의 고민을 놓고 진지하게 함께 고민하고, 이미 스포가 되어 있는 역사를 따라 같은 결정을 내리지 않으며,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고자 하는 어린 학생들의 생각을 엿보는 일은 늘 즐겁다. 마냥 어리기만 한 학생들일 줄 알았는데, 천진하고 예쁜 생각들부터 사려 깊고 냉철한 결정까지 어른인 내가 배울 점이 참 많다. 여러 사업을 확장해도 아이들의 글을 봐주는 일은 계속하고 싶다.
감독관 연수를 마친 다음에는 주말 역사체험교실 원데이 클래스 준비의 마무리 단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AI의 발전 속도가 놀라우리만치 빨라지며 인문학이 설 자리가 있을까 걱정했던 것은 나의 기우였다. 아날로그를 그리워하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인간만의 고유한 속성을 더욱 집요하게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시 역사와 인문학으로, 박물관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덕분에 오랫동안 준비하던 초등학생 역사 체험 교실이 중고등학생 대상으로 확대되었고, 성인들 대상의 수업도 오픈할 수 있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문화유산이 가득한 반만년 역사의 나라에 산다는 축복을 누리고 있으니, 더 즐겁게 많이 공부하고 재구성하여 흥미로운 내용을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이다.
교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께서도 새로운 도전과 발전을 기특하게 여겨주셨다. 콘텐츠와 스토리텔링이 살아남는 시대라며 학생들에게도 새로운 분야와의 접목을 적극 교육해 달라고 하셨다. 실패와 도전의 이야기를 많이 전해서 갇혀있지 않고,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아이들로 키우자는 협력의 말씀을 해주셨다. 이런 복을 또 어디서 누릴 수 있을까. 서울 편을 시작으로 가까운 경기도 인근 지역과 수원을 거쳐 부여, 공주, 경주, 군산, 강릉, 속초 등 지역을 넓힐 구상 중이다. 아직도 하고 싶은 일과 알고 싶은 일들, 보고 싶은 곳들이 너무 많다. 물론 먹고 싶은 것도.
사진 출처 : Unsplash_@Benjamin Davies
아이는 부모의 등을 보며 자란다고 했던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고 꼼꼼히 살펴주지 못했던 아이들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17살과 14살이 되었다. 아직도 매주 꿈을 바꾸지만, 사랑 가득한 엄마의 눈에는 치열한 진로 탐색의 과정으로 보일 뿐이다. 많이 시도해보고, 또 많이 실패해 보며 자신의 앞길을 주도적으로 설계해 나가는 단단한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사회생활 선배이자 늘 돌아갈 푸근한 곳이 되어주는 남편은 자축하자며 이미 준비 중인가 보다. 눈코뜰 새 없이 바빴던 하루.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없고,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던 하루가 이제 다 저물어 간다.
누군가 그랬다. '모범 답안이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선택을 정답으로 만들어 가는 삶이 잘 사는 삶'이라고. 이제 조금씩 근접해 가는 것 같다. 교사 TO가 나지 않아 기간제의 삶을 시작했고, 계획에 없던 아이를 빨리 가지며 나의 삶은 '기간제'에 눌러앉는 듯 보였다. 올해가 마지막일까 내년이 마지막일까 불안에 떨며 눈물로 지새우던 수많은 겨울들. 그 결핍과 걱정이 나를 이만큼 키웠다.
꽉 차게 분주한 하루가 버거울 때도 있으나, 나를 필요로 해주고 불러주는 많은 분들 덕에 여기까지 왔다. 쓸모가 다 하는 날까지 부지런하고 감사하게 감당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