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나 고위직에 오르려면 도덕적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 선진국일수록 그렇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지도그룹이 얼마만큼 깨끗한가, 권력과 요직이 누구에게 맡겨지고 그 과정이 얼마나 공정한가’ 같은 평가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조선시대의 노블레스들은 권리만 있고 책임·의무는 없었다. 그래서 왕권의 그늘에서 온갖 이권과 호사를 누리던 자들이 막상 나라가 망하자 일제에 빌붙어 일왕이 주는 작위와 거액의 은사금을 받고 조국과 겨레를 배신했다. 이런 축에도 못 끼는 자들은 친일파가 되고 부일협력자가 되어 일제에 충성하면서 호의호식했다.
지난해 12월 30일은 우당 일가 40여 명을 포함한 식솔 60여 명이 국치를 당해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한 지 100주년이었다. 그리고 올해는 이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신흥무관학교 창립 100주년이다.
세간에서는 우당 가문을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렀다. 삼한갑족이란 ‘옛적부터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들도 남들처럼 일제에 충성했으면 대대손손 부귀영화가 따랐을 것이다. 대학을 세우거나 기업을 만들고 신문사를 창립하여 ‘밤의 대통령’ 노릇도 하면서 귀족으로 떵떵거리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회영 일가는 달랐다.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망명하여 만주 류허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일제와 치열하게 싸웠다. 이들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양성소가 되고, 졸업생 3,500명은 항일투쟁의 선봉대 역할을 했다. 그 중심에 이회영이 버티고 있었다.
이회영은 권문세가의 지체 높은 유학자 집안에서 귀공자로 태어났음에도 썩어 문드러진 과거시험을 배격하고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을 배워 이를 실천했다. 을사늑약 뒤 헤이그 특사 파견, 신민회 창립, 고종 황제를 중국에 망명시켜 망명정부를 세워 일제와의 전면전 준비 기획, 3·1 혁명 기획, 신채호 등과 아나키스트 운동, 중국의 저항 문인 루쉰, 러시아 에스페란티스트(에스페란토 사용자)이자 맹인 시인이면서 아나키스트인 예로센코와의 교류 등 그의 역할은 독립운동사에 샛별과도 같았고, 묻혀 있는 일화와 비화는 참으로 다양하다.
이회영은 많은 독립운동 기관과 단체를 조직하고도 앞에 나서지 않았고, 많은 공을 세우고도 업적을 동지 후진들에게 돌림으로써 아나키스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역사가 무엇인지를 묻지 말고,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를 물어야 한다”라고 말한 사학자 키스 젠킨스Keith Jenkins의 주장대로 역사는 물론 국가·정부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지도층의 의식과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회영은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생애는 살아 있는 교과서요 ‘지나간 미래상’이다.
“하나의 민족은 자신의 높이, 위인, 위업, 위대한 사고思考를 지녀야만, 추종자의 목표가 높고 멀며 사회는 생기발랄해진다. 나는 이걸 사람됨의 높이라고 일컫는데, 바다에 비유하자면, 깊이와 넓이를 갖는다는 거지.” 청조淸朝를 타도하고 민국을 세우는 데 핵심 역할을 했던 대사상가 량치차오의 말이다.
이회영이 존경했던 량치차오의 이 말은 바로 우당의 말이고, 지금 우리가 찾고자 하는 그리고 우당이 추구했던 가치일 것이다. 이 책을 쓰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김삼웅, <우당 이회영 평전> 두레 2022, 11-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