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의 이론도 현실에 존재하는 현실을 읽고 쓰는 여러 이론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의 이론도 다른 모든 이론들처럼 수용되기도 하고 비판받기도 한다.
아도르노는 자신의 이론이 하나의 ‘모델’일 뿐이니 참고만 하라는 말을 한다. 그 말은 자신의 이론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경고일 수 있다. 또한, 스스로 모든 이론의 초월적 자리에 위치하지 않겠다는 자기반성적 태도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한 이유에서 그의 이론은 '현실의 한 가운데로' 들어갈 것을, ‘사태 자체에 충실할 것’을 강조한다. 그래야만, 현실에 '몰입'하여 '미시론적 사고', '내재비판'을 하면서 현실의 '모순'들과 마주하면서 현실의 한계를 '정면 돌파'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하기 위해 아도르노는 인식과 대상을 동일시하는 동일성 사유, 대상의 위치만 파악할 뿐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위상학적 사유, 대상들의 연관을 보지 못하게 분리하는 행정적 사유, 인간을 오직 자본과 권력의 도구로만 보는 도구적 이성을 비판한다.
더 나아가 아도르노는 ‘개념’, ‘본질’ ‘핵심’을 파악했다고 여기는 동일성 사유에 의해 비개념적인 것, 비본질적인 것, 비핵심적인 것으로 밀려나 배제되지 않도록 비동일자를 늘 인식하려 한다.
아도르노는 ‘제1원리’나 ‘근원’과 같은 하나의 유일한 ‘중심’을 비판한다. 그리하여, ‘별자리Konstellation’('짜임관계'-홍승용) 비유를 통해 ‘중심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는 관계’를 내세우며 ‘서로 다른 것들이 사랑하며 조화를 이루는’ 유토피아를 언급하기도 한다. ‘모순의 바다’를 건너야만 다다를 수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비판은 철학사의 주요 문제들을 관통하며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고 현실 변혁을 위한 맑스주의나 포스트모던 이론들과도 겹치거나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점에서 최고의 지성이라 불러도 모자랄 것 없어 보인다.
그처럼 완벽해 보일 지경인 아도르노의 이론도 비판을 받는다. 다른 것들은 차치하더라도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비판받는 현실 변혁을 위한 '실천적 전략'이 있느냐는 것은, 오늘의 시대가 그 어느 때보다 변혁적인 실천을 위한 전략들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비판일 수도 있다.
변혁적 실천을 위한 전략 부재는 그가 ‘노동자 중심’의 ‘당파성’이나 ‘전형’보다 만인의 ‘진정성’을 중요히 여긴다는 것, 그럼으로써 노동자 조직을 통한 조직적인 실천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아도르노에 대한 그러한 비판에 동의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도르노에게서 변혁적 실천의 전략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 아도르노에게서 배울 것은 배우면서 노동자들이 조직적인 실천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 중심으로 조직적인 실천을 하면서도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이 배제되지 않도록 그들과 평등한 관계를 이루며 변혁을 해나가는 것이 진정한 변혁이라는 것이 실천적 맑스주의자들이 이론적 아도르노에게서 배울 점이 아닌가 싶다.
2025.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