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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연주

by 영진

‘춤’이나 ‘음악’을 소재로 한 영화들을 예전엔 꽤 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좀 뜸한 것 같다. 지금 당장 내 머리가 떠올리는 ‘춤’ 관련 영화는 나에게 ‘발레’에 관심을 갖게 했던 영화 <빌리 엘리엇>이, 음악 관련 영화는 <브래스트 오프>(직장인 밴드), <아마데우스>(모차르트), <불멸의 연인>(베토벤),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쿠바 재즈), <위플래쉬>가 있다.


그 중에서도 드러머를 꿈꾸는 청년 앤드류의 이야기를 다룬 <위플래쉬Whiplash>가 종종 떠오르는 데에는 플래쳐의 ‘교육 방식’이 있다. 드러머라는 꿈과 음악에 대한 영화임에도 영화 개봉 당시 최고의 밴드를 이끄는 권위자로서 앤드류를 발탁했던 플래쳐의 교육 방식이 화제를 넘어 논란이 된 때문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교육자 자신도 교육 받아야 한다’,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만 변한다’ 교육하면 떠오르는 말들이다. 교육 환경과 교육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들이겠다. 언제부터인가 교육의 불가능성에 대한 말들이 있지만 백년지대계라는 말이 있듯이 애초에 교육은 만만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이야기임에도 논란이 됐던 것도 교육의 중요성만큼이나 교육에 관심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플래쳐는 ‘그만하면 잘했어’라는 말이 최고의 연주자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며 연주자들을 혹독하게 연습시킨다. 악보 없는 연주는 기본이며 자신의 박자가 아니면 무조건 틀린 것이며 연주자들의 사기는 일단 꺾어놓고 본다.


논란이 됐던 지점은 그 혹독함의 정도가 심했다는 것이다. 그 또한 플래쳐의 교육 방식이라고 한다면, 그 혹독함을 이겨냄으로써 뛰어난 연주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겠다. 그 훈련을 이겨낸다면 뛰어난 연주자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좌절하거나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플래쳐는 아무에게나 그와 같은 훈련을 시킬 것 같지는 않다. 앤드류가 그만한 재능이 있어 보여서 그를 발탁해서 뛰어난 연주자로 키우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교육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닌 특정 소수에 한정된 교육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나 플래쳐와 같은 최고의 권위자에게 교육받을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의 방식대로라면 대부분은 좌절하거나 깊은 상처를 입고 드럼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갈 가능성이 커 보이기도 한다. 그런 교육을 받아야 할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혹독한 교육을 하되, 혹은 혹독한 교육을 통하지 않고도 누구도 좌절하지 않도록 하면서 그들을 뛰어난 수준에 이르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모두를 위한 교육이 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할 수 있다. 교육자의 자질의 중요성에 대해, 교육자가 맘껏 교육을 펼칠 수 있는 교육 환경의 뒷받침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빼어난 재능을 가졌던 앤드류도 플래쳐의 교육에 의해 꺽인다. 한데, 그는 좌절을 딛고 최고의 연주를 하게 된다. 그 ‘최고’의 의미는 ‘자기’ 연주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 결과는 부단한 자기 연습이 가져다준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모든 피교육자가 앤드류와 같다면, 스스로 알아서 연습을 해서 뛰어난 수준에 이를 수 있다면 어떤 교육자가 교육하든 교육 환경이 어떠하든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앤드류와 같지 않기에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육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피교육자가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교육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교육에 대해, 그러한 교육을 할 수 있는 교육자와 교육 환경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겠다.



2025. 10. 11.




연습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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