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플래쉬 Whiplash] 읽기
스티븐 나흐마노비치는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이란 책에서 ‘연습’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히고 있다. “서구에서는 연습이 기술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이는 현재의 지루함이나 고통을 참아 미래의 보상을 받아낸다는 노동 윤리와 밀접히 관련된다. 하지만 동양의 연습 개념은 이와 다르다. 사람을 창조하는 것, 더 나아가 이미 존재하는 완벽한 인간을 드러내주는 것이 바로 연습이다. 연습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성이다. 선 수행에서는 마루닦이나 밥 먹기도 연습이라고 한다. 걷는 것도 연습이다.”(94쪽)
흔히 ‘예술이다!’라고 감탄하게 되는 ‘상당한 수준’에 이른 ‘기술’은 혹독한 ‘연습’의 결과라고 말해진다. 그렇듯 서구적 의미에서 연습은 중요하다. 연습 없이 기술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의 중요함은 기술이라는 결과를 얻는 수단으로써 중요하다는 것이지 연습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기술이라는 것이 연습의 결과라고 한다면 연습이 더 중요해 보이는데도 말이다. 어쨌든 기술을, 선 수행을 위한 방법이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겠다.
연습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한다면 지루함이나 고통을 참고 다다라야 할 상당한 수준의 ‘기술’이라는 전제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오직 연습 자체에 열중하는 것만이 중요해진다. 상당한 수준의 기술에 이르기 위해 스스로 연습을 해 나가다 보면 상당한 수준의 기술에 이르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정해지는 상당한 수준이라는 기준은 있겠지만 그 또한 절대적인 것일 수 없는 상당한 수준들 중의 하나일 뿐이겠다.
영화 <Whiplash>(2014)의 앤드류는 최고의 드러머를 꿈꾸는 청년이다. 그리고 그는 최고 밴드의 지휘자로 이름난 플렛처의 눈에 든다. 플렛처는 ‘그만하면 잘했어’라는 말이 최고의 연주자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며 연주자들을 혹독하게 연습시킨다. 악보 없는 연주는 기본이며 자신의 박자가 아니면 무조건 틀린 것이며 연주자들의 사기는 일단 꺾어놓고 본다.
앤드류 역시 플렛처의 연습을 이겨내지 못하고 꺾인다. 하지만 애초에 최고 수준이란 기준은 없었다. 다만 연습만이 있을 뿐이다. 다시 무대에 오른 앤드류는 최고의 권위자인 플렛처의 방식을 더 이상 따르지 않고 자신이 연습한 방식대로 연주함으로써 자신의 연주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최고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남이 정해놓은 상당한 수준이라는 기준에는 영원히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준을 쫓는 이상 자신의 연주는 할 수 없으며 세상 곳곳에 존재하는 플렛처와 같은 권위자들에게 연주가, 삶이 꺾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한 자만이 알 수 있는 남의 기준을 쫓는 삶이 늘 공허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앤드류가 멋있어 보였던 건 자기 연주를 하게 되었다는 것 때문이겠다. 그리고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가져다준 ‘연습’ 덕분이겠다. 그 연습에 플렛처와 같은 권위자가 한몫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최고의 연주, 최고의 삶은 어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그렇게 불리는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불리고 싶다면 오히려 그런 기준에 꺾이지 않고 스스로의 방식으로 해나가는 연습에 열중할 때 가능할 수 있겠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최고라는 것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며 그 순간만이 최고라 불릴 수 있겠다. 플렛처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연주를 해 나가던 그 순간의 통렬함! 만으로도 이 영화는 상당한 수준이다. 이 영화 또한 감독의 자기 연습이 드러나는 ‘순간’ 일뿐이겠다.
2015. 3.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