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빌리엘리엇> 읽기
발레는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아버지와 형의 편견 속에서 발레에 대한 빌리의 꿈은 커져만 간다. 재능이 엿보인다는 지도 선생님의 설득이나 꿈에 대한 간절함을 내보이는 빌리의 모습이 그들의 편견을 깨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던가. 아니, 자식의 꿈을 키워주는 것은 당연한 부모의 도리였던가.
그렇게 아버지는 빌리의 꿈을 위해 당신의 신념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광부인 아버지는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파업을 하고 있었지만 빌리의 발레학교 입학금 때문에 파업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 결국, 아버지는 다른 파업원들에게 배신자라는 손가락질을 당하는 수모를 자식의 꿈을 위해 감수한다. 영화 <빌리 엘리엇 Billy Elliot> 이야기다.
영화 같은 현실, 현실 같은 영화는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떠올려지고 이야기되곤 한다. 영화 속 빌리처럼 현실에서도 사회적 편견을 넘어 꿈을 이루어가는 이들은 있다. 어쩌면 꿈을 이루었기에 기억되고 이야기되는 것일 수도 있다. 얼마나 간절한가? 간절함의 크기는 꿈을 좌절하게 만드는 사회적 편견이나 현실적 조건을 ‘넘어서거나 포기하거나’를 근거 짓는다.
간절한 만큼 꿈은 이루어진다고, 꿈을 이루었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했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간절하지 않다면 굳이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저 꿈꾸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꿈꾸는 것만으로도, 꿈꾸는 것 자체로도 삶에 의미와 가치를 더해 준다고 말이다.
간절하다면, 간절하기에 꿈을 이루고 싶기에 꿈을 가로막는 편견이나 현실적 조건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사회적 편견은 편견을 부단히 부정하는 것으로 편견을 허물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편견은 오랜 시간을 두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문화적인 것이어서 강고한 벽과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듯이 빌리의 지도 선생님과 같이 편견 없는 이들에 의해 그 편견은 허물어지기도 하는 것일 테다. 편견은 대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강고하게 유지되는 것이지만 한 사람에 의해 허물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배신도 그럴 것이다. 자식의 꿈을 위해 파업에 동참하지 못한 것이 배신자라고 손가락질받을 일인가. 양자택일의 선택지 속에서 자꾸만 길을 잃게 만드는, 사회구성원들을 궁지로 내모는 꽉 막힌 사회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배신자인가. 과연 배신자는 누구인가.
사회의 계약에 따라 성실하게 일하며 때로는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파업을 포함한 노동쟁의를 하는 것은 법이 보장하는 합법적인 행위다. 노동하는 노동자들이 있기에 사회는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 노동자들이 ‘50억 클럽’과 같은 귀족 흉내를 내겠다고 노동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자신의 삶과 꿈을 일구어가는 노동자들 앞에서 수십억의 재산을 어떻게 축적했는지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배신자들일 것이다.
한국의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신의 꿈보다 자식들의 꿈을 위해서 자신의 건강과 안전을 뒤로한 채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 부모들이 자식들의 삶만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위해서도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조합 참여와 노동시간을 얼마나 줄일지 더 평등한 사회는 어떤 사회일지 다투는 것은 의미 있어 보인다.
성(性)에 대한, 노동에 대한, 노동조합에 대한 편견이, 또한, 세상의 모든 편견이 허물어지기를 바라는 꿈도 빌리의 꿈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의 간절한 바람에 의해서도 편견은 허물어지고 꿈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바람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그리하여 마침내 만인이 평등한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22.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