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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진 Sep 22. 2023

그대를 잃은 날부터

최인석 <그대를 잃은 날부터> 읽기

1     


소설 <그대를 잃은 날부터>는 현실에 근거한 현실 너머의 상상이다. 과거의 역사는 상상될 수 없는 것이지만 미래의 역사는 얼마든지 상상될 수 있다. 물론 그 상상이 현실이 될지 상상에 그칠지는 다른 문제이겠다. 다만 과거와 현재의 상태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상상할 때 상상의 실현 가능성은 커질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최인석의 이야기는 과거로부터 이어진 현재 ‘그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다른 미래를 상상하게 만든다. 서진으로 대표되는 ‘그대’는 ‘사적 소유라는 욕망’의 괴물에게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괴물들이다.      


준성 역시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괴물이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서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 또한 괴물과 닮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 ‘사적 소유라는 욕망’의 괴물과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차이는 있다.          



2     


“인간이 모두 괴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마술에 걸렸다는 것을 인정하고서 타인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해. 자신이 괴물이고 저쪽은 인간일 수 있다, 하는 태도로. 누가 우리를 이 마술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 이야기 속에서는 누이가 쐐기풀로 외투를 열두 벌 만들면, 왕자가 나타나 공주에게 키스를 하면 마술에서 벗어난다고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해야 이 악착같은 마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까? 누가 마술에서 풀어 주냐고 물었지? 아직도 모르겠냐? 괴물이 괴물을 마술에서 풀어 주는 거야. 당연하지. 왜? 우리가 다 괴물이거든. 괴물과 괴물이 만나면 서로가 서로를 마술에서 풀어줘야 하는 거야. 싸우고 죽일 게 아니라. 인간은 모두 괴물이니까.”(그대, 107)     


타자 혹은 다름, 객체 혹은 대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존중과 인정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존중과 인정을 모르는 폭력마저 존중하고 인정하라는 말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소설에서 ‘인정’의 의미는 조금 달라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 무한경쟁의 정글에서 살아남아야 하기에 ‘더 잘 팔리는, 더 잘 소비하는’ ‘상품’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하다 승자가 되든 패자가 되든 자신도 삶도 그대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      


최인석은 그러한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괴물’이라고 불렀고 그 있는 그대로의 괴물과 같은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서로를 괴물이라는 마술에서 풀어 주는 일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다.          



3     


“‘고마워요. 준성 씨.’ 그녀가 말했다. 미안하다고, 준성은 다시 말했다.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지난 일 년 동안 당신이 나에게 준 게 뭔지 당신은 모를 거야. 세상에 어느 누구도 그런 걸 받아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이 준성은 고마웠다. 그저 진이를 좋아한 것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반짝 빛났다. 그러나 서진은 애써 참았다. 눈물은 흘러내리지 않았다. 난 알아. 날 좋아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야.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준성의 가슴을 쳤다.”(그대, 315)      


준성이 반짝 빛나게 했던 서진의 눈물을 통해서 그녀가 ‘처음으로’ 그 누군가에 의해 ‘한낱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그녀’라는 이유로 ‘사랑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준성의 행위가 서진의 삶에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준성은 서진을 괴물로부터 지켜주려 하고, 서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려 하고, 사람들이 누구나 원한다고 믿고 있는 것, 행복, 즐거움, 자신감, 안정감, 편안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려 한다.           



4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목숨까지 걸지만 인정받고 사랑받지 못하는 이들이 늘 존재한다는 것은 앞다투어 먼저 인정하고 사랑하지 않는 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인정받고 사랑받겠다는 생각 이전에 인정하고 사랑하겠다는 생각을 경쟁적으로 하게 되면 인정과 사랑이 넘쳐 너나없이 인정받고 사랑받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먼저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쉽다면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라는 물음은 먼저 인정하고 사랑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때쯤이면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지겠지만 말이다.      


인정과 사랑의 어려움을 자본 권력이 야기한 사적 소유라는 감각의 문제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인정과 사랑의 문제도 자본 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기득권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 덕분에 그들에 비해 더 많은 기득권을 누리면서도 자신의 기득권을 ‘사회화’하려 하지 않는 한 구성원들이 서로 인정받고 사랑받는 사회는 요원해 보이는 것이다.      


소설에서 ‘인정’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그대를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그대를 빼앗아 가는 자본 권력이라는 괴물에 의해 그와 비슷한 괴물이 되어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기도 하고,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자본이라는 괴물로부터 그와 비슷한 괴물이 되지 않도록 ‘그대’를 지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최인석, <그대를 잃은 날부터>, 자음과 모음 2010.



2015.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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