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한 논의(논쟁) 가운데 자신의 파악이 옳다고 주장하는 기준들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사유와 실재 사이의 일치 여부, 정합성 정도, 혹은 파악된 것의 현실성(현실적인 의미, 힘, 이익 등) 등이 있다. 그럴 경우에도 기준이 되는 것은 ‘실재’일 수밖에 없다. 사유 자신이 포함된 실재 말이다.
‘실재’에 대한 사유들이 ‘실재’에 대해 파악한 것들을 두고 논의하며 합의에 이르면 좋겠지만, ‘이익과 권리’ 앞에서 대립하고 충돌할 수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실재’가, 그들 사이의 ‘이익과 권리’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유’가 첨예하게 충돌 할 경우 ‘사유의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실재는 알 수 없다며 자기가 아는 것도 부정하는 ‘불가지론’, 자신은 ‘중립’이라며 자신 없이 지배적인 사유를 따르게 되는 사유, 모든 사유가 똑같이 옳다는 ‘상대주의’의 사유, 실재를 자기와 무관한 듯 ‘있는 그대로’ 파악한다는 ‘실증주의’의 사유 등이 그렇다.
이들 사유가 ‘함정’에 빠졌다고 하는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 ‘실재에는 자신의 사유도 포함 된다’는 사실, 심지어 자신의 사유에 따라 ‘실재가 변하여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것 때문이다. 그러한 사유는 자신의 현실성(현실적인 의미, 힘, 이익 등)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을 만드는, 자신이 만드는 실재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의미를 파악하지 않으려는, 실재 속의 자기를 부정하는 사유는 실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유가 된다. 실재를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서 사유하는 ‘자본주의국가권력 및 기득권 세력’이 바라는 사유이기도 할 것이다.
‘불가지론’, ‘중립’, ‘상대주의’, ‘실증주의’의 사유에서처럼 실재에서 자신을 부정하는 사유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사유의 힘’에 따라 ‘실재’를 파악하며 실재 속의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며 자신이 바라는 실재를 만들어가는 것일 테다.
-하영진, '자신이 바라는 실재를 만들어 가는 것', <보라의 시간> 303-3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