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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_미학수업(3)

by 영진

265

안정과 지속은 생활의 중요한 요소지만,

이때의 안정이 기계적인 반복이라면 한번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온갖 순응주의가 주는

안락함을 때로는 떨쳐낼 수 있어야 한다.

예술은 이런 순응주의에 대한 비강제적

예방 조치이고 면역체계다. 자동성에 대한 이 같은

거부는−그것이 궁극적으로 문화적 헤게모니의

요구에도 미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철저하다.

예술은 그 어떤 것에도 자기 결정의 권리를

양도하지 않는다. 의타적·자족적 의식이야말로

예술의 죽음이다.[문광훈, 미학수업, 27]



266

시간 개념은 발터 벤야민에게 오직 변증법적 이미지

−“인식 가능한 지금”과 연결되지만, 우리는 이것을

인식만이 아니라 감각과도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

대상은 인식되기 전에 느껴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느끼고 생각하는 지금 시간’과 ‘이 시간 속의

변화’를 통해 조금씩 갱신해간다. 현재의 실존적 변화가

중요하다면, 이 변화의 시간은 예술에서, 예술의

경험에서 가장 밀도 있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심미적 현재성이 지닌 폭발력이다. 예술은

아마도−그것이 나의 생생한 느낌에서 시작한다는 점에서−

이런 변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실행하는 대표적인 장소로 보인다.

[문광훈, 미학수업, 27]



267

예술의 경험은 밀도의 경험이다. 예술 작품에는

과거로부터 전해오는 미래의 에너지가 경험의

잔해로 기억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를

얼마나 넓게 느끼고 얼마나 깊게 생각하는가는

각자에게 달려 있다.[문광훈, 미학수업, 27]



268

예술은 삶의 한계 속에서 어떤 자유를 느끼게 하고,

그 자유 이상의 책임을 떠올려 주며, 이런 책임 속에서

다시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지를 절감케 한다.

자유와 책임 중 하나라도 누락 된다면, 예술은 미망에

불과하다. 대중을 우매한 집단으로 변질시킨 파시즘의

예술 스펙터클은 이 점−집단적 광기로서의 예술을 잘

보여준다.[문광훈, 미학수업, 27]



269

삶의 변화는 내가 꿈꾸면서 다른 사람의 꿈을

깨울 수 있을 때 비로소 일어난다. 우리는 예술

속에서 다시 꿈꾸고 선택하며 새롭게 깨어나

행동하게 된다. 마치 새 실을 앞에 두고 어떤 물을

들일까 고민할 때와 같다. 혹은 교차로에 들어서는

일과 같다고나 할까. 교차로, 문턱, 건널목은 이런

이질적 영역 사이의 교감과 이행에 대한 은유이다.

어떤 길을 가게 될 설렘과 그 길을 선택함으로써

가지 못할 길에 대한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는.

예술은 설렘과 아쉬움의 교차 경험이다.

이는 우리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잠시 돌아보게 한다.[문광훈, 미학수업, 28]



2025.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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