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소망을 이루려는 이에게는 상대와 현실에 대한 이해가 중요할 것이다. 이해가 부족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이해는 늘 부족할 것이기에 오해는 늘 생길 것이다. 상대와 현실을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되겠지만 믿는 만큼 이해의 가능성은 커질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상대와 현실을 수용하며 존중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대는 자신과 다르기에, 현실과 이해는 다르기에 현실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고 존중을 통해 상대와 현실을 이해하거나 공감하거나 동의하거나 갈등하거나 설득하거나 타협하거나 하게 될 것이다. 누구나 자신에게만큼은 절대적으로 옳은 자신의 이해를 강요하는 것은 상대와 현실에 대한 존중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자기 이해의 강요로 인해 상대와 현실에 대한 오해는 늘 생길 수 있는 것이고 오해는 풀리지 않을 수도 있고 풀지 못할 수도 있다. 오해는 상대나 현실과 무관한 자신만의 이해에서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괜한 오해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확인되지도 않은 오해’에 대해서 오해했다고 오해하는 것은 확인되기 전까지의 오해일 뿐일 것이다. 상대나 현실을 이해하려 노력하거나 확인되지 않은 오해로 괜히 오해하지 않는 것도 상대와 현실에 대한 존중과 믿음을 키워줄 것이다.
‘정치‧경제‧인간적으로 평등해서 인간들이 자유롭게 서로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상태’를 나는 사랑하며 소망한다. 그런 소망은 ‘지금, 여기’의 현실을 이해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여기’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그런 사랑과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이해된 것만을 사랑하고 소망하지는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내가 사랑하고 소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랑과 소망의 불가능성이 이해되는 것도 불가능하겠지만 설사 이해된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사랑과 소망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과 소망은 사랑하고 소망하는 것 그 자체가 사랑이고 소망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사랑과 소망의 원인과 결과에 관계없이 사랑하고 소망하게 되는 것이 사랑과 소망일 것이다.
얼마든지 ‘지금, 여기’의 현실을 오해할 수도 있고 ‘지금, 여기’의 현실에 대한 이해는 늘 필요하겠지만 그런 것과 관계없이 사랑과 소망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은 중요하다. 믿음은 현실을 넘어서거나 사랑과 소망을 이루기 위한 현실을 만들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도 소망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삶의 진리는 이토록 단순한 것이 아닌가. 험난하고 복잡한 것이 삶일지라도 말이다. 때론 노래하며 함께 웃으며 걸어가는 것이 삶이기도 하다고 믿는다.
-하영진, '오해와 믿음', <웃으며 한 걸음> 94-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