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태 자체를 강조하는 이유가 내재 비판과 연관이 있다. 전략을 짜려고 해도 사태를 파악해야 하고 사태 자체를 면밀히 봐야 한다. 그렇게 보다 보면, 제대로 현실을 파악하면 어떤 전략이라든지 새로운 대안이 나온다고 얘기할 수 있다.
레닌은 진실 또는 이론에 근거해서 전략을 찾았다. 반대로 스탈린은 전략에 근거해서 진리를 만들었다. 어느 쪽이 합당하냐 했을 때 레닌이 합당하다는 사람도 있고 스탈린이 더 맞지 않냐 이런 사람도 있다.
전략은 우리가 ‘목표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목표 의식과 거기에 들어가는 수단들을 고려해서 이론은 따라
가는 것 아니냐. 그래서 니체주의적인 원근법적 사고, 담론이 힘이고, 권력이라고 하는, 푸코 등등의 틀들이 스탈린주의 하고 뭐가 다르냐. 주체 역할을 그만큼 강조하는 것 아니냐. 물을 수도 있다.
변증법이 이른바 실증주의를 전적으로 거부한다면서 사실은 실증주의에 빠지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주체가 적극적으로 투쟁해서 없는 걸 있게 만드는 그 투쟁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물을 수 있다.
지젝 같은 경우가 그쪽이다. 없는 게 있게 되는 것도, 그러니까 유토피아 좋다 가자 한다고 해서 가지는 건 아니다. 조건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현실적인 조건 안에서 갈 수 있는 힘, 일종의 무기다.
가능성이다. 그냥 주의주의로 가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또 주의주의적 요소가 전혀 없어져도 항상 대세만 따르게 되는, 잘못하면 기존에 있는 조건이 다 갖춰져야만 뭘 하겠다고 드는 것도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스탈린식은 많은 희생을 초래한다. 지젝도 많은 희생을 초래한다. 사후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후유증이 심하다. 그 두 가지를 따로 볼 건 아닌 것 같고 그것도 변증법적으로 당연히 결합되어야 하고 사태 자체, 객관 현실 그 속에는 주체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주체의 의지, 주체의 목표 의식, 전략, 이것들이 다 같이 작동하고 있다. 자기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주장을 하고 어떤 글을 쓰느냐가 이 사태와 무관한 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이 사태가 변한다. 그럼 그 변수도 고려해야 한다.
강하게 대중들을 설득하려면 객관적인 것들, 기존의 것들, 즉, 경제 구조, 자본주의의 한계, 현재의 정치 지형, 이런 것들을 분석하는 것은 기본이다. 하지만, 그것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되고 거기다가 우리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변한다는 사고방식도 끼워 넣어야 한다.
그건 스탈린주의적인 요소가 있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역사가 이렇게 변할 거야. 이거 빼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 어떤 주제 하나 나오면 60년대는 어떻게 했고 70년대는 어떻게 했고 80년대는 어떻게 했고 촛불 때는 어떻게 했고 현재는 어떻게 했고 이걸로 95% 채우고 끝에다 몇 줄을 쓴다. 이게 남 얘기만 하는 글쓰기다.
지금 핵심의 문제가 이것인데 우리가 무엇을 하자는 것이 없다. 근데 무엇을 하자는 얘기를 하는 순간 잘못하면 그 조직에서 왕따가 되거나 다른 조직으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거나 타깃이 되거나, 이런 우려가 늘 있고 그래서 자기가 거기서 책임지기 싫다는 것이다.
그런 심리가 작동하는 것 같다. 조직 안에서 활동할 경우 항상 그런 우려를 동시에 하게 된다. 이게 조직 전체에 피해가 오는 건 아닌가. 누구 심기 건드리는 것 아닌가. 자기 검열을 미리 하는 것이다.
진짜 사태 자체로 들어가고 거기서 진짜 문제가 뭔가를 보고 그다음에 자기 나름대로 그 문제를 놓고 깊이 고민을 해서 이 문제 풀이는 이쪽이 답인 것 같다는 최소한의 대안도 찾는, 이런 글쓰기가 필요하다.
근데 이걸 회피하면 맨날 딴 얘기만 한다. 스탈린 방식이 후유증이 커서 싫다는 것이다. 지젝은 희생을 전제로 하고 실패해라 그다음에 또 잘 실패해라. 불완전한 상태로 시작하라. 이런다. 그러면 희생이 불가피하다. 희생은 나중에 사후 구제하는 것이다.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고 그래도 희생을 최소화하고 승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실마리라도 찾아서 이론가가 그걸 제시할 수 있어야 전략적으로 그래야 이론가다. 그렇게 이론화해야 한다.
-하영진, '전략적 사고', <도시의 무지개> 230-2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