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의 기본에 이런 건 있다. 칸트는 선험적 주체 그러니까 그렇게 인식할 능력을 갖춘 감성 오성 이성을 갖추고 시간과 공간이라는 직관 형식을 갖추고 있는 인간이라고 선험적인 존재를 상정하는데 아도르노에게 그것은 무의식적인 사회적 주체다.
의식하지 않아도 오랜 역사적 과정 속에서 형성된 사회적 산물로서의 주체다. 자기가 어떤 사회적 존재라는 걸 의식하지 않더라도 이미 사회적 주체다. 이런 주장을 한다. 맑스는 그 비슷한 얘기를 또 따로 한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오감, 내려오는 것은 세계사의 산물이다. 세계사의 업적이다 그런 표현을 한다.
세계사의 산물이 그냥 우리가 오늘날 시각적으로 자명하게 받아들이고 또 내 눈은 당연히 이렇게 보고 귀는 이렇게 듣고 그렇게 보는 눈 그렇게 보는 감각이라는 것 자체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것이다.
장기 구조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것’을 브로델이 ‘장기 지속 구조’라고 이야기한다. 본성이라고도 표현한다. 인간의 본성 또는 유적 존재 등등 그 개념들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역사적 사회적 산물이다. 그걸 의식하지 않을 뿐이지 사실은 사회적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게 무슨 초역사적인 선험적인 그런 게 아니라고 한다. 유전의 결과물일 뿐이고 시간 공간이라는 객관적인 구조가 있다는 것이다. 이게 가변적이지만 칸트주의에 대해서는 유물론 쪽에서는 부분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칸트가 노력한 게 있다. 가능한 한 보편타당한 인식으로 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한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인간이 맨날 니 보는 거하고 내 보는 게 완전히 달라도 상관없이 살 수는 없다.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된 인식, 보편타당한 것 찾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그것보다 또 더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 그런 현상 개념에 담겨 있는 인간 주체의 인식 조건에 대한 반성이다.
인간이 인식할 때 어떤 조건 아래에서 인식하는가. 칸트는 나름대로 인간학적인 조건을 찾으려고 노력한 게 아닌가 하는 것이고, 그렇게 찾았다고 얘기한 것들이 헤겔쯤 가면 벌써 또 막 흔들리기 시작한다.
맑스한테 가면 그보다 더 중요한 다른 조건이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이다. 경제적 토대가 더 결정적이라고 보는 것이고, 그에 따라서 인간의 의식이라는 게 어떻게 결정되는가. 니체는 권력의 문제, 프로이트한테 가면 성적인 충동들 이런 것들이 인간의 의식 구조를 끊임없이 형성해 나온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칸트는 그 출발점에 있는 것이다. 반성, 그러니까 인간의 주체적 조건에 대한 반성의 출발점에 있는 것이다.
-하영진, '인간의 인식 조건', <도시의 무지개> 284-28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