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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_정희진처럼 읽기

by 영진

282

코너를 돌아 모르는 곳에 들어설 때까지

내 앞에 무엇이 버티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 긴장은 ‘진실’이라는 신세계에 대한

두려움, 혼란, 호기심, 쾌락……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긴장이 나를 살게 한다는 것이다.

[정희진처럼 읽기, 61]



283

살려면, 기대를 낮춰야 한다.

‘글을 쓸 수 없어 죽는다’는 건 ‘생명 경시’가

아니다. 오히려 삶이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태도다.

삶의 매 순간이 의미, 호기심, 열정의

연속이라고 믿는다면 ‘재능 없는 천재’의 좌절,

자기모순, 동반 자살 실패의 죄의식,

경멸하는 인간들과의 경쟁, 심지어 패배…….

이건 삶이 아니다. 그의 영원한 인기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죽도록 사랑했기

때문이다.[정희진처럼 읽기, 65]



284

“평화는 고통의 정중앙에 놓여 있다.”라는 목소리는

보편적 인간 조건을 극복하지 말고 항복할 것을

권한다. 슬픔에 저항하지 말고 느끼고 통과하라는

것이다. ‘슬픔에 잠긴다’는 우리말은 정확하다.

몸이 슬픔에 잠겨 눈을 뜰 수도 없고 숨을 쉴 수도

없는, 살아 있는 죽음의 시간을 겪는 것이다.

고통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슬픔의 가치를

수용하는 것. 이것이 국가 간 평화든 마음의 평화든,

평화를 논의하는 전주(前奏)이다.[정희진처럼 읽기, 58]



285

권력 관계가 지배자의 성찰로 뒤바뀌는 경우는

없다. 이것은 모든 권력 관계에 해당한다.

인간은 요구나 투쟁이 아니라 상대방이 기존과는

다른 반작용(re/action)을 행사할 때 변화한다.

구조는 개인에게 미치는 작용이고 그 구조에 대한

개인의 행위성을 반작용이라고 할 때, 구조에

편승한 이들의 변화는 약자의 예상치 못한 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들’이 기대하는 익숙한 패턴을

파괴하는 것이다.[정희진처럼 읽기, 91]



286

나는 모든 글은 질적 차이가 있을 뿐이지

예술과 외설, 논문과 잡글, 사실과 허구,

본격소설과 통속소설(심지어 참여문학과

순수문학!)문학과 사회과학 따위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짧은 인터넷 댓글과 [죄와 벌]을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글을 읽고

즐거움, 의문, 성찰을 경험했다면

글의 소속(?)은 중요하지 않다.

논문은 칼럼보다 우월하고 논픽션은 픽션보다

사실에 가까운가? 혹은 그 반대인가?

문제는 글의 내용과 정신이다.

[정희진처럼 읽기, 128]



2025.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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