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달빛

by 영진

술만 마시면 달리기하자던 산악부의 정익이 형. 산 정상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자기가 이겨야만 끝나는 우리 둘만의 한밤의 시합. 형이 이기면 내가 일부러 져줬다고 다시 하자하고, 내가 이기면 자기가 이겨야 하니까 다시 해야 하고. 그렇게 늦은 밤 달빛 아래 두어 능선을 넘고서야 끝이 나곤 했다.


이제 막 선두를 섰던 나에게 후배들 잘 이끌어 가라고 길을 알려주려던 것이었다던, 이제 막 군에서 제대한 까까머리 정익이 형이 그 당시 나에게는 ‘은은한 달빛’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때론 버너의 불이 바람에 꺼지지 않도록 막아주던 바람막이가 되어주었고, 때론 추운 겨울 암벽의 한중간에서 한시간씩 벌세우며 정신 차리게 했던 은은히 곁을 지켜주던 사람이었다.


정익이 형의 또 다른 주사酒邪는 ‘신곡 발표’였다. 하루의 산행을 마치고 저녁을 먹고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면 노래를 시키는 것이다. 그것도 신곡이어야 한다. 지난번 산행 때 불렀던 노래도 안 된다. 근데, 막상 노래하면 잘 듣지도 않는다. 후배들 신곡 발표를 핑계로 자기가 노래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래를 잘하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그랬던 정익이 형이 취업 준비한다며 사라졌다 취업했다며 다시 나타난 그해 이맘때였나. 신곡 발표가 있었고 형은 취업 준비하느라 신곡 준비를 못했다며 자신의 애창곡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를 불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형이 그 노래만 수년째 부르고 있다고 했다. 군 제대를 얼마 앞두고 사랑하던 여인이 세상을 떠났다고.


그 쉽지 않은 노래를, 노래도 잘못하면서 불렀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내 사랑 그대 내 곁에 있어 줘 이 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정익이 형을 비롯해 ‘은은한 달빛’과도 같았던 그들이 생각나는 가을밤이다. 그들에게 받은 빛을 누군가에게 내어주고 있는지 생각하는 가을밤이다.



2025. 1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