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 모험적인 시도 앞에 도사리는 가장 큰 위험은 흔히 반지성주의는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상태로 드러난다는 통념을 조장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식인에게 불만을 품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지식인에 대해 양면적 감정을 갖는 듯하다. 즉, 존경하고 경외하면서 동시에 의심과 원한을 품는다. 이런 사람들이 이제껏 많은 사회와 역사의 국면에서 늘 있어왔다.
어쨌든 반지성주의는 사상에 대해 무조건 적의를 품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제대로 배운 사람의 가장 유력한 적은 어설프게 배운 사람인 것처럼, 으뜸가는 반지성주의자는 대개 사상에 깊이 몰두하는 이들이며, 종종 케케묵거나 배척당한 이런저런 사상에 강박적으로 빠져드는 이들이다. 반지성주의에 빠질 위험이 없는 지식인은 거의 없고, 일편단심으로 지적 열정에 사로잡힌 적 없는 반지식인도 거의 없다.
반지성(44)주의가 역사적 연원을 추적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해지거나 당대의 논쟁거리가 될 만큼 널리 퍼지게 되면,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닌 대변인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대변인은 대체로 배우지 못한 사람도 아니고 교양 없는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주변적 지식인 혹은 자칭 지식인이거나 소속 집단에서 제명당한 지식인, 인정받지 못해 울분을 품은 지식인 등이다. 학식이 있는 그들은 읽고 쓸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지도하며 스스로 주목하는 세상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고매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아는 반지성주의 지도자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매우 지적이고 일부는 학식도 풍부한 복음주의 목사들, 신학을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는 근본주의자들, 상황 판단이 무척 빠른 이들을 비롯한 정치인들, 사업가나 그 밖에 미국 문화의 실용적인 요구를 대변하는 사람들, 강한 지적 자부심과 확신을 지닌 우파 편집인들, 다양한 주변적 작가들(비트족Beatnik의 반지성주의를 보라). 지식인 사회의 다수 집단이 지난날 표방한 이단 사상에 격분하는 반공反共 석학들, 그리고 지식인들을 활용할 수 있을 때는 한껏 써먹었지만 지식인들의 관심사는 극도로 경멸하는 공산주의 지도자들 등이다.
이 사람들의 기질에서 그토록 두드러지는 적대감은 갖가지 사상 자체, 심지어 지식인 자체를 겨냥한 것이 아니다. 반지성주의의 대변인들은 거의 언제나 어떤 사상에 헌신하며, 살아 있는 동시대인들 가운데 눈에 띄는 지식인들을 증오하는 것만큼이나 오래 전에 죽은 일부 지식인들−애덤 스미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장 칼뱅, 심지어 카를 마르크스조차−을 추종하기도 한다.
ㅣ출처ㅣ
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태터 지음, 유강은 옮김, 교유서가 2025.
원제 :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 (196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