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이따금 반지성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이 그것을 무조건적인 신조나 일종의 원리원칙처럼 여기며 헌신하고 있다고 보는 것 역시 무자비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시각이다. 사실 반지성주의는 대개 모종의 정당화될 수 있는 의도에서 빚어진 우발적 결과이다. 누구나 자신이 사상과 문화를 거스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고 웃으면서 “그래, 오늘은 지식인을 고문하고 이념의 목을 졸라야지!” 따위로 말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아주 드물게, 그리고 극도의 의구심 속에서 특정 개인을 타고난 반지성주의라고 지칭할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이처럼 개개인을 분류하거나 낙인찍는 일은 아무런 가치도 없을 것이다一그리고 분명 이것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태도와 운동과 이념의 역사적 경향을 파악하는 일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일부 사람들은 어느 쪽으로든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사실 반지성주의는 서로 대립하는 세력에게서 공히 나타나는 특징이다. 기업가와 노동조합 지도자는 지식인 계급에 대해 놀라울 만치 비슷한 견해를 가질 수 있다. 더구나 혁신주의 교육 자체에도 강렬한 반지성주의적 요소가 들어 있는데, 이런 교육을 가장 단호하게 공격하는 우파 자경단원들도 나름의 반지성주의를 드러낸다. 그들의 반지성주의는 비록 스타일은 다르지만 좀더 확연하고 호전적이다.
단순하고 절대적인 악을 보란 듯이 논하는 것은 분명 일종이 사치이다. 하지만 본서에서 다룰 문제는 이런 것이 아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처럼 반지성주의가 우리 문명에 널리 퍼져 있다면, 그것은 반지성주의가 대체로 정당한 대의, 적어도 옹호할 만한 대의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가 우리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감정을 사람들에게 불어넣은 복음주의 신앙에서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가 정치의 세계로(46)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평등을 향한 우리의 열정과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반지성주의가 교육계에서 막강한 세력이 된 것은 교육에 관한 우리의 신념이 복음주의에 입각한 평등주의였다는 사실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가능한 한 지성에 의한 수술이라고 할 만한 끈질기고 섬세한 방법으로 선의의 충동에 기생하는 반지성주의를 잘라내야 한다. 지성에 의한 수술을 하면 이러한 충동 자체가 불필요해진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반지성주의를 검증하고 억제할 수 있다.
나는 반지성주의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악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는 고삐 풀린 열정은 우리 시대의 다른 망상들처럼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47)
ㅣ출처ㅣ
미국의 반지성주의
리처드 호프스태터 지음, 유강은 옮김, 교유서가 2025.
원제 : 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 (196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