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여성주의의 ‘쓸모’>라는 글에서 글쓴이가 ’쓸모‘라고 쓰고있는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거의 대부분 동의하는 내용이다. 발췌해서 보니 굳이 ’여성‘에 한정되는 ’쓸모‘인가 싶다. 내가 관심 갖고 있는 ’인간 해방, 자연 해방, 노동 해방‘을 위한 ’쓸모‘가 아닌가 싶다.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여성의 언어를 포함해 모든 명명(命名)은 누군가/무엇인가를 배제하는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다.
페미니즘은 시민들이 가져야 할 하나의 교양이나 가치관이지, 한 사람이 가져야 하는 모든 정치적 태도가 될 수 없다.
페미니즘은 글쓰기와 공부, 인간관계, 개인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
내가 지향하는 것은 남성과 평등한 제1의 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일단, 이 목표는 ‘어떤 남성’과 같아질 것인가의 물음 앞에서 불가능한 임무가 된다.
내가 지향하는 페미니즘은 타인을 자신을 설명하기 위한 부수적인 존재로 동원하는‘백인 남성’의 사고방식을 따라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제3의 성(아줌마, 난민, 이주민…)’을 만드는 데 동참하지 않는 실천이다.
페미니즘은 자신이 어떤 여성인지 사회적 위치성을 드러내고 그 인식의 부분성을 인정하는, 매 순간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 과정이다.
페미니즘은 ‘주류’ 사상이 될 수 없다. 페미니즘은 아무도 뒤에 남겨두지 않는 <가장 느린 정의>(리아 락슈미 피엡즈나-사마라신하 지음, 전혜은·제이 옮김, 오월의봄, 2024)를 원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삶과 경험이 보편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보편성이 백인 남성의 삶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기왕의 모든 언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험일 뿐이라고 상대화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보편성의 반대는 특수성이 아니라 차이라고 본다. 차이는 끊임없이 보편을 재구성하므로 보편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배제되는 이들의 목소리에 의해 그 모양을 달리한다.
이것이 다양한 목소리의 화음,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라는 통념만큼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도 없을 것이다. 아니, 이는 오해를 넘어 폭력이다. 민주주의는 배제 없는 세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다양성을 존중하되, 당파성 없는 다양성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극우, 반동성애주의, 여성 혐오를 다양성이나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다.
나와 다른 입장을 상대화하는 태도와 상대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다르다. 상대주의는 자기가 선 자리, 입장을 드러내지 않는 사고방식이다.
페미니즘은 여성들 간의 차이를 핵심 사상으로 한다. 여성들 간의 차이는 보편적 이론으로서 여성주의를 ‘불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여성주의의 가장 큰 자원이자 이론적 근거이다.
여성주의는 맥락적 사유라는 점에서 원칙이 없다. 이론도 하나의 담론적 현실이라는 의미에서 이론과 현실의 경계도 없다고 본다. 상황에 맞게 계속 사유하고 매 순간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 한다.
페미니즘은 현실에 ‘적용’하는 이론이 아니다. 나는 “서구 이론을 한국 사회에 적용한다”는 태도 같은 식민주의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때 한국 사회는 언제나 서구의 자료, 데이터에 불과하게 된다. 현장, 지역성(로컬리티) 자체가 이론이다.
페미니즘은 나를 알고 너를 알고 세상을 아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다. 사람들마다 입장에 따라 유효성은 차이가 있겠지만, 페미니즘은 멈춤 없는 사유라는 점에서 상당히 쓸모 있는 ‘아는 방법, 사는 방법’이다.
2025. 1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