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언어’도 ‘중립적이거나, 보편타당하거나, 절대적이거나’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언어든 ‘중립, 보편타당, 절대’의 이름으로 마치 그런 것처럼 특정한 사람들이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회적 통념’과 같은 관념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만일, ‘참한 사람’이 되는 것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라면, ‘참하다’는 것의 기준은 누구의 것인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사회적으로 충분히 논의되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참하다)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간접적으로나마 인간의, 타인의 감정과 삶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문학과 예술’이기도 하다.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감정과 그들의 삶은 ‘그럴 수도 있는’ 현실이다. 작가가 꾸며낸 것이라는 점에서 허구이지만 그 역시 현실이다. 허구의 현실성, 진실성 여부 역시 현실에 기반한다. 작가와 함께, 작품과 함께, 독자와 함께, ‘문학과 예술’은 현실을, 진실을 현실화하기도 하는 것이다.(연수웅 이야기 2)
나의 삶이 한강 작가만 아니라 한국 문학에 빚진 것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감사한 마음이다. 한국 문학을 읽으며 많은 시간을 살아왔다는 점에서 감사하다. 한국 문학이 앞으로의 나의 삶과 글짓기에 더 많은 자극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감사하다. 한국 문학이 지구인들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되기를 바라본다.(위대한 시간)
하이에나로 살거나 정상에서 얼어 죽고 싶은 사람은 잘 없을 것 같아. 이상과 사랑을 위해서 모든 걸 던져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은 살아보고 싶을 것 같은데. 정상도, 표범도, 이상도, 사랑도 불꽃까지도 그 대상이나 의미는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야. 잘 타오르지 않더라도 대상도 의미도 찾아서 타올라 보겠다고 시도하다 가는 것 아닌가. 시도라도 하면 흔적이라도 남을 테니까. 불꽃처럼 타오르려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다 가는 거지. 시도도 안 하면 아쉬울 것 같아.(불꽃)
하지만 적어도 더 낫지는 않더라도 지금과는 다른 세상에 살아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라고 한다면 현실 만족이라는 것 역시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안락한 현실이라는 환상을 생산해 내는 지배이데올로그들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물론, 그러한 환상 속의 현실 역시 현실이기는 하다. 결국 어떤 현실을 살아갈/만들어 갈 것인가? 라는 물음은 개인의 선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이라는 것은 개개인이 자신을 포함한 다양한 주체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다르게 생성될 수 있는 진행형으로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마라와 사드)
진실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은 늘 부단히 제기되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새삼스럽지 않다. 그 물음을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묻는 것이야말로 진실에 다가가는, 조작되지 않은 진실을 만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더 많은 지식인, 창작자, 대중들이 자본이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자의식적인 눈'을 통할 때 진실이 조작되지 않을 가능성, 자본에 의해 조작되지 않은 진실한 삶의 세계를 만날 가능성은 커질 테다.(자의식적인 눈)
평범해 보이고 누구나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것들이다. 누구나 말할 수 있고 알고 있지만 실천하면서 살기는 쉽지 않은 것들이다. 자신이 알고 인민들에게 요구했던 것들을 스스로의 삶에서 실천으로 보여주는 모습이 인민들에게 신뢰를 주었을 것이다.(호치민과 리더십)
‘이성, 평등, 휴머니즘, 세계시민주의’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생물 종은 ‘진화’가 아니라, 혹은 ‘진화’만 아니라 즉, ‘생존’을 위한 ‘경쟁’인 ‘경제적 자유방임, 제국주의, 인종차별, 민족 우월주의, 군국주의, 침략 전쟁’이 아닌 방식으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생물 종의 존재 방식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진화와 진보, 그리고 과학)
2025. 12. 4.
문장 출처 - 천천히 한 걸음 괄호 안은 글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