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괴리가 있으니까, 어차피 괴리가 있는 것 틀리면 어때? 하는 사고가 포스트 모던에 있다. 거기에 리얼리즘은 있을 수가 없다. 우리가 반영하는 건 다 엉터리이기 때문에 재현이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할 만큼 하는 건데 마치 완벽한 재현이 아니면 재현이 아닌 것처럼 얘기하는 것이다. 완벽한 인식이 아니면 인식이 아닌 것처럼 알 수 없다는 식으로 가는 거다. 우리가 아는 건 부분적이고 불완전하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건 어차피 파편적이고 왜곡되고 그러니까 우리는 알 수 없어 이렇게 가는 거다.
리얼리즘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한다. 언어라는 협소한 매체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현실을 반영하냐. 반영은 엉터리다 말도 안 된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거다. 그래서 더 열심히 반영한 것과 엉터리로 반영한 것, 거꾸로 반영한 것, 구분 안 하려고 그런다. 그게 리얼리즘에 대한 반론의 요체 중 하나다.
어차피 다 시뮬라시옹인데 리얼리티 따라 우기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식이다. 모두 다 픽션이라는 거다. 픽션인데 진리라고 떠들어대는 것들은 자기가 픽션인 것도 까먹은 픽션이다 이렇게 얘기를 한다. 자기가 픽션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한 픽션. 그걸 우리가 진리라고 착각한다. 이런 식이다. 근데 픽션이라도 같은 픽션이 아니다. 더 적절한 픽션이 있고 그걸 효과로만 따질 게 아니라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봐야 한다. 대상과의 관계를 기본으로 깔고 있다.
그러니까 진지하게 뭔가 현실을 알려고 노력하는 변증법은 끝까지 알아보자. 이러는 거다. 괴리가 있다는 걸 알더라도 그 괴리를 없애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니냐. 역사적 한계 속에서라도 그러자는 게 변증법이다.
-하영진, '리얼리즘과 픽션', <도시의 무지개> 296-2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