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소유 감각

by 영진

칼 맑스는 [경제철학초고]에서 ‘사적 소유’라는 감각이 인류의 지배적인 감각이 된 근거는 ‘소외된 노동’이라고 밝히고 있다. ‘소외된 노동’이 ‘사적 소유’라는 감각을 탄생시킨 비밀이며 그렇게 탄생한 ‘사적 소유’라는 감각은 ‘소외된 노동’을 통해서만 유지·존속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 둘은 한 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외된 노동’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노동자를 전제로 한다.


“(노동자가) ‘자유롭다’는 것은 자유로운 노동자가 자유로운 인격으로서 스스로의 노동력을 스스로의 상품으로서 마음대로 처분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판매할 다른 상품을 갖고 있지 않고 자기 노동력의 실현에 필요한 모든 물적 조건에서 떨어져 자유롭다는 이중의 의미에서이다.” 자신의 생산수단이었던 토지를 빼앗겨버려 생산수단이 없으니 공장에서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에게 몸을 팔아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어쩔 수 없이 자유로워진’것이다.


약탈과 침략을 통한 자본축척 및 자본의 편에 선 정부와 법, 그러한 것들의 집합체로서의 국가라는 공식을 그대로 따르는 자본주의 사회라면 칼 맑스가 사적 소유 및 소외된 노동의 결과로 묘사한 노동자들의 상태는 과장이나 우연이 아닐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까지 보인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신을 긍정이 아니라 부정하며 (…)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서 자신을 느끼며 노동 안에서는 자신의 외부에 있음을 느낀다. 그는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 편안함을 느끼고 노동을 할 때에는 편안하지 않다. 따라서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된 강제노동이다. 따라서 노동은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노동이 아닌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칼 맑스가 지적하고 있듯이 ‘소외된 노동’의 중대한 폐해는 인류의 삶 전체의 파괴, 즉, 노동자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한다는 데에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협력적인 관계가 아니라 늘 적대적인 대립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동료들은 더 이상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이 아니라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밟고 올라서야 할 적일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침략과 약탈을 기반으로 완성된 ‘사적 소유-소외된 노동-사적 소유’라는 지속적인 상태는 인류의 감각마저 변화시키게 된다. “모든 신체적 정신적 감각들을 대신하여 이 모든 감각들의 단순한 소외 곧 소유라는 감각”이 생겨난 것이다.

“사적 소유 내부에서 (…) 각자는 타인에게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주는 일을 노리고 투기하며, 이로써 타인을 새로운 제물이 되도록 강요하고, 새로운 예속관계에 빠뜨리며, 새로운 방식의 향유와 아울러 경제적 파멸로 오도한다. 각자는 타인을 지배하는 낯선 본질력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한다. 따라서 대상들의 양이 증가함에 따라 인간이 예속되어 있는 낯선 존재들의 영역도 커지며, 새로운 생산물은 모두 상호기만과 상호약탈의 새로운 잠재력인 것이다. 그럴수록 인간은 인간으로서 더욱 빈곤해지며, 적대적인 존재를 제어하기 위해 더욱더 많은 돈을 필요로 하게 된다. 또한 돈의 힘은 생산의 양에 반비례해 하락한다. 즉 돈의 힘이 증대함에 따라 돈은 더욱더 필요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돈에 대한 욕구는 국민경제학이 생산하는 진정한 욕구이며, 그것이 생산하는 유일한 욕구이다.”


이렇듯 약탈자들에게서 시작된 타인에 대한 약탈과 착취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충족시키려는 ‘사적 소유’라는 감각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을 겪은 노동자들에게도 보편적인 감각이 되기에 이른다. 약탈과 착취를 통해서 가능해진 사적소유라는 감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게 만드는 현실이지만 부단히 반성하는 것도 필요하겠고 그러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가능한 행동을 부단히 하는 것도 필요하겠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져다 줄 반성의 시간들이 필요할 텐데 그 시간과 환경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관건이겠다.



2026.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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