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보려고 하는

by 영진

칸트는 나름 혁명적이기도 하고 위대한 면이 있다. 누구나가 다 그렇게 생각할 줄 알고 누구나 다 미감을 가지고 있고 왕이나 제후들만 미감을 가진 게 아니고 무지렁이들도 다 동일한 미감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그런 점에서는 평등주의자고 보편성을 강조하는 그런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여러 가지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다.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 할 때는 그 모순이라는 것이 감성을 초월한 단계에서만 생겨나느냐 아니면 감성과 오성이 갈라지느냐 등등은 헤겔이 제기하는 문제다.


그런 게 아니다. 오성 없는 감성 없다. 감성 없는 오성도 없다. 같이 섞여 있다. 같이 작동한다. 물론 다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것들을 따로 놓을 수는 없다. 그래서 감성을 초월한 영역이라는 걸 따로 한정할 필요 없이 이미 처음부터 모순은 우리 인식이 진행되는 한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모순을 인식의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헤겔은 그런 입장으로 갔던 것이다.


영역을 칼같이 나눌 수 있느냐 하는 부분에서 헤겔이 문제 제기한 것이다. 그렇게 모순을 어느 일정한 영역에서만 인정한 것들, 그것도 부정하고 초감성적 영역에서 이율배반에 빠진다고 봤던 것, 그건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모순이라는 게 그냥 내 사고의 영역에만 제한되는 게 아니라 실은 현실의 모순이 문제라는 것이다. 칸트는 자료들이 감성을 통해 들어온다. 감성을 통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여 전에 자료는 카오스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우리가 거기에다 오성의 법칙들을 적용해서 드디어 질서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내가 거기에 법칙을 투여한 것만 나는 안다. 이런 논리다. 그것도 좀 말이 안 된다. 헤겔은 이미 대상들이 다 그런 감성, 오성 등등과 더불어서 개념적으로 정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질서를 가진다. 대상 자체도 이미 우리가 개인적으로 알기 전에 축적되어 온 노동의 결과로 이미 현실 자체가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법칙적인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자연에도 그런 것들이 알게 모르게 삼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관념론적인 측면도 있다. 어쨌든 그런 대상 자체가 카오스는 아니다. 일정한 법칙성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사후적으로 또 알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 이성이 자연에 투여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알아가는 그런 측면이 또 있다. 그것은 절대적 관념론 아니냐.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유물론적 입장에서 봐도 어딘가 대상이 아무 질서도 없는, 법칙도 없는 그런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현실 자체도 그렇다. 뉴튼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기 전에는 그 법칙이 작동 안 했느냐 이런 문제다.


우리가 인식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자연의 법칙이 이미 작동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유물론이다. 헤겔은 그쪽에 더 가까운 것이다. 맑스 엥겔스 관점에서 보면 헤겔은 뒤집힌 유물론이다. 관념론적인 설명을 하고 관념론적인 틀로 보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헤겔의 논리 전개는 유물론과 다를 바 없이 진행된다. 그런 점에서도 칸트와 달라진다.


영역 구분을 칼같이 하는 그런 사고방식은 오늘날에도 분업화되고 사물화 되고 하는 그런 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상호작용과 상호 전도 이행 이런 것들을 같이 보려고 하느냐 하는 건 변증법의 문제의식이다.



-하영진, '칸트와 헤겔의 차이', <도시의 무지개> 185-188쪽.




도시의 무지개